[스크랩] 반정신의학 antipsychia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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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신의학 [ 反精神醫學 / antipsychiat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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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반정신의학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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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반정신의학 Sherry Turkle 서론 1968년 혁명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정신의학계는 미국의 에고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자치구역화와 약물요법을 일반화하는 개량주의적 조치들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68년 혁명을 배경으로 한 자치구역화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진 집단을 출현시켰으며, 그것은 반정신의학적 사유를 따르고 있는 일군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라깡주의 써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광기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하는 빌헬름 라이히와 마르쿠제의 이론이었다. 프랑스의 반정신의학의 주제는 첫 번째 라깡이 에크리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은 광기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다. 광기를 행하지 않고서는 자유의 한계를 알 수 없다”라는 언급에 주목하면서, 라깡의 영향을 받는다. 두 번째로 반정신의학은 정신의학의 정치적인 목표가 전문가집단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반해, 전복적인 담화를 할 수 있는 것에는 광기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소통할 수 없는 기성의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는 들뢰즈․가따리의 『앙띠 외디푸스』에서 언급한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기획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혁명과 욕망(=내재된 광기)의 관련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실제로 반정신의학의 새로운 노선을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들뢰즈․가따리의 욕망에 대한 언급은 프랑스의 반정신의학을 고무시켰으며,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이 공모하면서 구조화된 사회적 질서를 사고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돌파구를 제시해 주었다. 라깡주의는 사실상 프랑스에서 맑스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유 속에 녹아들었으며, 1968년 혁명이후의 일련의 주변부 반란 속에서 탄생한 수감자, 어린이, 광인, 여성 등의 새로운 주체를 설명할 수 없었던 기성의 기획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깡과 전복으로서의 정신의학 라깡은 미국의 자아심리학을 거부하면서, 자아self의 차원과 다른 탈중심화된 구조적인 언어의 심급을 다룬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로 구조화된다라는 생각 속에서 언어의 차원으로 정신분석학의 차원을 확장시킨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증례로 들면서 탈주체적인 기표작용을 예로 드는데, 그것은 아버지 기표에 의해서 아이의 무의식이 구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라깡은 미국식의 데카르트적 자아의 정상성과 다른 비정상성의 영역에서 탈주체적 언어 구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라깡로 탈중심화된 자아가 어린 시절에 거울반영을 통해서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한 거울이미지의 정체성은 사회 속에서나 가족 속에서 구조화되는 오이디푸스적 구성에 의해서 재직조된다고 본다. 즉, 통합된 자아와 정상성을 추구하는 미국 자아 심리학자들과 달리, 라깡은 분열되고, 탈중심화되며, 구조에 의해서 욕망을 조종당하는 주체성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데카르트적 자아ego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징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며, 프로이드의 전통을 따라 정상적으로 보이는 자아의 영역은 준안정상태에 불과하며, 모든 정상성 이면에 신경증이나 정신증 등 광기로 규정될 수 있는 사회역학적인 무의식의 흐름이 전제된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이다. 반정신의학과 언어학적 전복 라깡은 자아심리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수학적 모델과 상징, 기호, 도상, 도표 등의 자신의 언어학적 상징시스템으로 개입하는 방식, 그리고 보통의 언어에 매우 특이한 방식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법, 그리고 전략적으로 새로운 담론을 창조하는 법 등을 통해서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라깡의 전략에 대해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앙띠 외디푸스』에서 반정신의학의 수준에서 응답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 한 기관기계는 원천기계에 연결되어 있다....우리는 각자 자기의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기계에 대해서 기관기계가 있는 것은 언제나 흐름들이 있고 단절들이 있기 때문이다”(AO 15p) 『앙띠 외디푸스』는 언어와 구조라는 대응쌍을 복잡성과 흐름속으로 바꾸어낸다. 라깡이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일대일의 상관관계 의미하는 것이며, 대상과 구조의 상응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들뢰즈․가따리는 상응관계를 넘어서 복잡성을 내포한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으로 정신분석학에 응답한다. 라깡이 생각하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초월적 기표작용의 수동적 존재였던 아이는 기표로서의 상징을 사용하고, 상징계 내부에 자율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체성으로 들뢰즈와 가따리에 의해서 사고된다. 이제 아이는 아버지의 권위와 그의 이름에 대한 호명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즉 기표의 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상징체계내로 들어갈 수 있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러시아혁명처럼 무슨 일들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프로이드 박사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발명해 냈다. 외디푸스 삼각형은 이상주의자들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그 두 사람은 욕망하는 생산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욕망이라는 영역이 단순한 재현의 영역이 아니라, 실재하는 하나의 역동적인 흐름의 원동력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아로서가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반정신의학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반정신의학의 기획을 자본주의 분석의 기제로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자아라는 설정이 자본주의의 구조화에 의해서 가족, 사적 소유의 개인, 사생활을 가진 개인들이라는 설정으로 분화된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앙띠-외디푸스와 반정신의학이론 자본주의는 리비도라는 욕망의 혁명적 흐름을 가족 내로 투사시키려는 사회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테제는 자본주의의 사회, 역사적 문제를 가족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한다. 욕망하는 기계의 코드화와 탈코드화는 이러한 영역에 대한 설명의 기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탈코드화라는 엔트로피의 증가는 사회적 언어로서 설명될 수 없는 무질서의 영역을 증가시킨다. 사회의 투쟁은 이 탈코드화라는 분열적인 흐름에 의해서 분쇄된다. 가따리는 분열분석의 제안을 통해서 욕망이라는 무의식의 작동이 전의식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역동적으로 혁명으로 돌입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제 분열분석은 정신분석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의미에 대한 분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분열분석으로 대체되며, 분자적인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체제의 문제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간다. 반 정신의학은 가족주의적 기획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적 신성가족의 모델을 넘어서서 욕망의 문제제기 즉, 1968년 혁명과 같은 사회적 문제의식을 욕망 스스로가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바로 오이디푸스적 사회질서를 넘어선 주체성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앙띠 외디푸스』 자본주의의 사회적 대립을 감추는 다양한 기제를 폭로하며, 욕망을 하나의 혁명의 원동력이자 생산의 원동력으로 만들어낸다. 들뢰즈가따리의 동시대적인 정치적 함축은 정치적 표현을 미시정치적 수준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1968년 혁명의 자발적인 집단들의 합성과 집합적인 표현을 이론에서 현실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프로이드’, 맑스 그리고 반정신의학 프로이드와 맑스는 『앙띠 외디푸스』에서 도전해야 할 두 개의 전통으로 불린다. 정신분석학이 개별화된 개인을 다루는데 반해 맑스주의는 사회적 맥락속에서 정신분석학의 카테고리를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맑스주의 좌파들은 정신분석학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비판하였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이 부르주아사회에 적응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었다. 라깡의 정신분석학의 도착perversion이라는 경고는 이러한 방향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두 번째 잘 알려진 맑스주의의 접근은 정치, 경제, 역사적 상황에서 개인에 대해서 인류학적 접근이었다. 이러한 계급주의적 입장은 공산주의자인 폴리체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세 번째는 바로 루이 알뛰세르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알뛰세르는 맑스와 프로이드를 결합하면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작동양식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를 인식론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했다. 1968년 혁명은 이러한 맑스와 프로이드의 결합을 붕괴시킨 사건이었다. 이 시기는 빌헬름 라이히의 욕망의 정치적 역학이라는 강좌가 소르본느대학에서 수행되던 때였다. 68혁명의 급진화된 학생들은 라깡을 통한 미국의 비판이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의 위계를 허무는 사실에 주목한다. 라깡의 시도는 급진적인 맑스주의와 결합된다. 그러나 라깡의 모델은 실재적인 육체의 욕망, 위기, 공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적인 면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반정신의학은 라깡으로부터 분리되어 정신분석학의 조건일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 정신병동에 대한 푸코의 문제제기도 영향을 주었다. 정신분석학은 정상과 비정상(광인)이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사실상 사회적 통제에 공모하고 있었다. 이 시기 카스텔Castel과 기 카로Guy Caro와 같은 사회학자이자 투쟁활동가는 『앙띠 외디푸스』에 영향을 받아 병원의 치료시스템에 대해서 개입하기 시작했다. 반정신의학과 급진적 슬로건 카스템은 빠리의 지식인에게 반정신의학이 던져준 충격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발점은 라 보르드병원의 가따리, 우리, 폴락 등의 인물들에 의해서 조직되고 있었다. 처음 발간된 편집물에서 환자들이 자신의 소외된 경험을 초현실주의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것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급진적인 반정신의학의 실험과 정신, 이념 등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론 보르드 병원도 다른 병원처럼 전기충격요법이나 약물요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르드병원은 그것은 반정신의학운동이 치료적 위계를 비판하고, 정상성의 신화에 대해서 비판하고, 라깡의 상징체계의 위선을 밝히는데 최전선에 있었다. 보르드병원을 중심으로 한 반정신의학은 편집물을 통해서 반정신의학의 우드스탁과 같은 대회를 열기도 했다. 풀뿌리 반정신의학 풀뿌리 정신의학은 반정신의학운동을 넘어서 실제적인 정치운동으로 나아가고자 조직되었다. 시설 정보 그룹(the Asylum Information group)등이 조직되어 정신병원의 상황을 이웃그룹에게 알리고, 각자의 그룹들이 대항섹터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이 그룹의 압력으로 정신질환자들이 병원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보수언론은 사회 위험인물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 그룹의 압력으로 가난한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서 가이드라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단연행에 대한 거부와 감시가 이루어졌다. 이 그룹은 반정신의학에 대해서 광인의 해방적 역할을 낭만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당사자들의 힘든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약물정보와 약물효능 등을 정신질환자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서도 개입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기술적 해결책은 가난하고, 저항할 수 있는 세력들을 감옥시설, 학교시설, 가족 등에 유폐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사회불만세력을 잠재울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이 바로 “그는 정신병자다”라고 매도하는 것이라고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1968년 혁명이 터질 당시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상성의 규범의 외부에 존재했으며, 국가의 입장에서 시민들이 정신병자로 비춰졌다. 이러한 사회역학적 상황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규정 일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라깡적인 치료적 개입은 매우 반동적이었으며, 이와 결탁한 맑스주의 당도 말할 나위 없다. 1968년 혁명 이후 바리케이드는 학생진영에서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반정신의학에도 있다. 지금도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우리는 정규직이며 풀 타임 노동자라서 아플 여유가 없었지만, 당신처럼 파트타임 노동자나 정신질환 운운하는 것 아니요?” [출처] http://www.koreagreen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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