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나는 자주 나의 정신치료법이나 분석방법에 관해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에 나는 분명한 답변을 할 수는 없다. 치료법은 각각의 사례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의사가 나에게 자기는 엄격하게 이러저러한 ‘치료법을 따른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의 치료효과를 의심한다.
사람들이 문헌에서 환자의 저항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 환자에게 뭔가 강요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료는 환자로부터 자연스럽게 진전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정신치료와 분석은 인간 개체가 그러하듯 다양한 법이다.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심리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로 뒤집을 수도 있을 때에만 타당한 것이 된다. 나로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해결책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의사는 소위 ‘방법’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규격화된 일정한 방식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적인 전제는 다만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은 그 전제가 타당할지 모르나 아마도 내일은 다른 전제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나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어떤 분석에서는 내가 아들러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다른 분석에서는 프로이트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의사도 무언가 할 말이 있고 환자도 마찬가지다.
정신치료에서는 어떤 ‘방법의 적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정신의학 연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 자신은 정신치료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기까지 오랫동안 일해야만 했다. 1909년에 나는 이미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교양있는 지성적인 환자들을 다룰 때 정신과의사는 단순한 전문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의사는 모든 이론적인 전제에 매이지 않고, 환자를 실제로 충동질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필요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론의 증명이 아니라, 환자가 자기 자신을 한 개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총체적인 관점을 참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의사는 그러한 관점을 습득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의학교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인간 마음의 지평은 의사 상담실의 시야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는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전과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정신의 변이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교육분석에서 의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환자도 이를 배우지 못한다. 의사가 배워 알지 못한 마음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환자 역시 마음의 한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분석에서 의사가 개념체계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의사는 피분석자로서 분석이 바로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교육분석은 실제적인 삶의 한 부분이지 무조건 암기하여(문자 그대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교육분석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나 치료자는 나중에 그에 대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른바 ‘작은 정신치료’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본래의 분석에서는 환자와 의사 모두 그 전인격이 대상이 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고는 치료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치료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았을 때, 결정적인 것은 의사가 자기 자신을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자기 권위로 씌워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치료자는 자기 자신이 환자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수시로 해명해야 한다.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칼 융,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248~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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