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감시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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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감시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
신 승철 <노동자의 책> 집행위원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어”,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 절규하며, 거리로 나선 광인이 있다. 광인에게는 초월적인 감시의 눈이 살아있는 음파와 진동이 되어서 귀를 맴돌고, 존재하지도 않는 무엇이 보이며, 느껴지기조차 한다. 어차피 광인과 정상인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사회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는 어느 시대보다 분열자이기 때문이다. 분열자로서 규정받는 노동자들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왜 우리는 분열자이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감시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 의문만큼이나 우리의 의문도 생기게 될 것이다. 작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자감시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정신질환에 처하게 된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하여 신경정신과 의사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단지 신경을 둔하게 하는 약물을 처방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해 줄 뿐이다.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이 집단적 정신질환을 발생시키는 사회 병리적 현상을 개인적인 정신적 상태의 문제로 치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신치료를 받는 노동자들은 이제 의사의 약물치료 앞에 철저히 개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를 발생시켰던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 관계의 전자감시는 더 정교해지고 세밀해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수한 감시카메라에 자신을 노출하고 있던 노동자가 고민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현재의 문제 그리고 미래의 문제로 다가올 감시사회의 문제는 도대체 과연 어떤 철학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을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지배질서의 논리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그들은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대하여 말하여야 할 때가 왔으며, 그것을 오히려 투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우리들은 감시카메라 앞에 사슴처럼 두려움에 떨며, 작업장에 내몰려 있는 노동자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집단화된 주체로서 행동하며, 그러한 감시질서에 대해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정신적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더 고도의 집단으로 더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시의 논리의 역사적 기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데 있지 않다. 원시사회에서 권력자들 대부분은 신의 자손이나 아들을 자처했는데, 그것은 현실을 넘어선 신의 초월적인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이다. 초월자인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지배자들의 초월적 능력도 사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주인-노예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획득된 능력이지 정말 신의 아들이어서 획득한 힘은 아니다. 그것쯤은 어린아이들도 다 알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질서는 초월성에 힘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 내에서 사고하다보면, 마치 신의 능력이 전지전능하며, 초월적인 힘이 현실 속에서 발현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허위의식이다.
근대 사회의 혁신은 이 초월성의 질서를 변화시켰다는데 있다. 근대의 계몽이성은 종교비판을 통해, 새로운 이성적인 질서의 지배를 선언하였다. 이제 신 대신에 이성이 지배하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질서가 합리적인 자기정당성을 가지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그 합리성은 새로운 초월자를 위한 것이지 초월자의 권력을 제거한 것은 아니었다. 신의 초월적 눈은 이성의 초월적인 눈으로 뒤바뀐다. 이러한 근대의 눈-이성에 대한 비판은 푸코의 이론에서 발견된다. 푸코는 판옵티콘이라는 벤담의 감옥 모델을 관찰하면서, 이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가 사실은 새로운 초월자의 감시의 질서를 의미함을 폭로한다. 판옵티콘은 감옥이나 공장, 정신병원, 학교의 감시질서의 모델로서, 중앙에 감시 망루에 있는 감시자가 피-감시자에게는 어른거리며 잘 보이지 않는데 반해, 감시자에게는 똑바로 잘 보이기 때문에, 피-감시자는 늘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통제하게 만드는 모델이다. 푸코의 이러한 근대사회에 대한 감시모델의 추적은 한마디로 눈-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이성이라는 질서도 알고 보면 새로운 초월자이며, 합리성 운운하면서도 관음증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다.
물론 근대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므로, 선거에 의해서 초월적 권력자가 선출된다. 우리 자신이 만든 권력자이며, 초월자이기 때문에 이성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새로운 이성의 초월성은 사실 우리 자신의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낸 권력에 다름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우리가 만든 권력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감시의 눈길은 더 정교해지고 있다. 이 전도된 현실은 우리가 만든 관계에 의해 우리가 감시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사회는 자기모순적인 사회이자, 전도된 사회이다. 노동자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자본이라는 초월자에 의해 감시당하고, 대중은 자신이 선출한 국가권력에 의해서 감시당한다. 민주주의라는 내재적인 관계는 권력이라는 초월적 관계로 역전된다. 근대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측면에서 내재적인 민주주의를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민주주의만으로 한정하여 초월적 권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공장의 생산을 통제하며, 욕망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산수단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분열자이다.
그럼 근대의 초월적 이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성이라는 개념은 눈이라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매우 강조한다. 이성적 인간은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이다. 인식대상과 인식주체, 주관과 객관 등의 철학적인 논제들도 알고 보면,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중요한 판단의 능력으로 바라본 것이다. 근대의 이성이 볼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다는 것은 바로 감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성은 초월적 국가권력이나 근대자본의 볼 수 있는 능력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사회에서 신의 아들을 자처하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권력자의 논리는 근대로 가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장치들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볼 수 있다는 이성의 능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조지오웰의 <1984년>은 이러한 감시사회 전반을 예측한 작품이다.
1984년, 세계는 세 개의 거대 제국으로 나뉘게 된다. 항상 전쟁 중이며, 전 인민의 일거수 일두족은 항상 지배자에 의해 모니터링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한정된 개념 한도 내에서 사용된다. 포화의 전쟁터, 빅브라더는 모든 매체를 통하여 대중을 통제한다. 대중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기관들 내에서 기관원으로 활동할 뿐이다. 그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는 도청장치와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감시사회의 예측은 전체주의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이다. 전체주의는 실지로 스탈린 시대 아버지를 고발함으로써 소년영웅이 되었던 어린이에 대한 찬양으로 실제 현실이 되었다. 전체주의는 모든 사람을 국가기관의 기관원으로 만들려고 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그러한 감시사회의 이면에는 당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이성중심주의가 있다. 당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감시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짐 케리가 주연한 영화 <트루먼 쇼>는 한 개인의 실존적인 문제가 사실은 구경꺼리로 전락한 사회를 고발한다. 이 영화를 통해, 감시자의 심리를 알 수 있게 한다. 누구나 감시자가 될 수 있으며, 초월자로서 느긋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검색하고 체크할 수 있는 권력의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트루먼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사실 그는 전 세계에 그의 삶을 생방송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주연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의 삶은 몰래카메라에 의해 모니터링 되고 있다. 그는 주변을 감도는 부자연스러운 일들을 눈치 채고,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현실로 탈주한다. 마지막에는 초월자인 양 모니터를 감독하던 연출자가 인위적인 공간에서 살 것을 종용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
이 영화에서처럼, 감시의 대상에게는 괴로운 일이지만, 감시자는 자신이 마치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 감시체제의 문제점이다. 감시 속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권리 같은 것이 없다. 단지 권력으로서의 시선의 작용만이 있는 것이다. 감시자들에게는 권력이 부여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권력이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가 통합되어 관리되는 방향으로 추진된다는 점이다. 정보가 통합될 수록 각 개인에 대한 정보는 입체적으로 재구성되어, 그의 전반적인 삶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합전자카드 사업이랄지, 학생의 정보를 통합관리하고 있는 네이스랄지의 문제점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에서 추진하려 했던 전자 팔찌도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강남구에서 설치했던 CCTV도 사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즉, 감시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의 초월적인 권력에 있다. 레닌주의가 노동해방을 외치면서도 전 인민이 상호 감시하는 스탈린주의라는 전체주의로 일거에 변모할 수 있었던 이유에도 바로 이 서구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그 배경이다. 왜냐하면, 당은 가장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결정을 하기 때문이며, 대중위에 올라선 초월적 권력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중을 감시하고 통제할 전체주의적인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대중 스스로가 상호 감시하는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을 요구하였다.
어찌 보면, 우리는 수많은 눈들 틈에서 살고 있다. CCTV, 몰래카메라, 카파라치, 전자스토킹, 전자주민카드, 네이스, GPS, 유비쿼터스 등 수많은 전자직조물의 눈들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렇게 전자감시의 눈들이 성장하게 된 이유는 대중의 삶의 정보를 관음증적으로 들여다봐야지만,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초월적인 이성의 논리가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미시적인 삶의 모든 부분을 포획하며, 감시하는 권력을 ‘생체권력’이라고 정의한다. 푸코의 생체권력의 논리는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변모를 겨냥하고 있다. 훈육사회는 간단히 말해서, 권위주의적인 지배방식이다. 훈육의 채찍과 매로 학생, 정신병자, 노동자, 수감원을 다루는 방식이다. 훈육사회의 모델의 향수 또한 존재한다. 권위적이었던 선생님(혹은 권력자)의 매가 따뜻했으며, 훨씬 인간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금은 어떠한가? 선생님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매를 들지 않고 수행평가에 가차 없이 반영한다. 선생님은 감시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감옥과 병영과 병원 등의 권력의 시스템도 그러한 통제와 감시의 평가모델로 대중을 옭아멘다.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변화는 사실 권위주의에 맞선 대중의 반란이었던 1968년 혁명 이후에 전면화되기 시작하였다. 68혁명은 권위적 지배체제에 맞선 청년학생, 노동자들의 혁명이었다. 그 시기 이후 권위로서의 지배방식은 심각하게 제고되었고, 통제의 모델이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통제의 모델은 전자정보기술의 발전에 의해 고도화되고 완성되었다. 현재의 사회는 어느 시기보다 전면적인 포획과 감시의 질서가 작동하는 ‘실질적인 포섭’의 상황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장치의 내부로 편입되어 있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저항 또한 사회적 장치의 재구조화로 결정되고 만다. 이러한 포획장치의 성장은 욕망에 대한 통제를 겨냥하고 있다. 68년 혁명이 입증하였듯이, 사회적 반란을 이끄는 힘은 사실상 대중의 역동적인 활력인 욕망에 있다. 대중의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의 기저에는 이러한 욕망이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나를 감시하는 겁니까?” 항변한다할지라도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원죄를 갖고 있는 이상, 대중은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통제사회는 욕망의 능동적인 힘을 늘 감시하며, 자신의 시스템의 변조를 신속히 이루어내기 위하여 늘 상 감시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이제 철학적인 배경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끝났다. 노동자들은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에 감시당하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만든 초월적 권력의 이성의 눈 아래에 새로운 분열자로 규정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은 어느 시대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욕망을 통제받으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가? 사회적 관계의 내재성이 우리의 삶의 지평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역동적인 욕망을 해방시키고, 새롭게 생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육체는 역동적인 흐름 속에 있으며, 감시와 포획의 질서에 의해서 화석화되거나, 그들의 증거물로서 남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감시는 더욱 고도화되고, 세련되어지고 있으며, 첨단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감시의 눈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우리의 프라이버스와 인권이 모두 상실되고 투명한 방에서 오들오들 떨며 우리의 벌거벗은 실존에 대하여 느껴야 하는 상황으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활력과 욕망은 감시의 눈이라는 초월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느껴지고 생성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가 권력의 새로운 논리인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자기정당화의 이성적인 논리와 그 이면에 비이성적인 관음증적 감시 장치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모두 다 포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지평 속에서 초월적인 권력을 발생시키지 않는 절대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생성시키고 있다. 그것은 공동체적 소통과 자율적 행위와 삶에 대한 자기결정력이다.
우리의 존재는 어찌 보면, 이 우주의 작은 돌멩이 하나와 잎사귀, 꽃, 바다, 공기와 같은 존재다. 우리의 존재는 누가 바라본다 해서 바뀌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속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 속에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욕망을 생성시키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무한한 접속과정에서 천개의 모습으로 변모될 수 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멋진 존재들이다. 감시하는 사람이 으슥한 골목에서 “난 너에 대해서 알고 있다.”라며 협박할 지라도, 그들이 우리의 이 아름답고 멋진 삶의 영원성을 해치거나 왜곡시킬 수 없다. 우리의 내재적인 삶은 초월적인 권력의 논리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의 눈은 차가운 감시의 눈이 아니며, 따뜻한 관심의 눈이다. 우리의 귀는 환청에 쫓기듯 시달리는 귀가 아니며, 삶의 리듬과 공명의 연주로 가득한 귀다. 우리의 육체는 수동적으로 상처받았던 육체가 아니라, 수천가지의 춤과 변용으로 가득한 욕망의 육체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 감시당하며, 핍박당하며, 상처받아 절규하던 노동자들이 드디어 욕망의 공장을 스스로 작동시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욕망의 공장에서 생성된 수많은 창의적인 예술작품들이 그들을 지켜보던 전자적인 눈들을 순싯간에 놀라움과 경의의 눈으로 뒤바꾸고, 뚜벅뚜벅 지상에 잠재력을 드러낼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듣게 될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은 이미 초월적인 권력의 논리들의 기만들에 대하여 깨닫고 있으며, 스스로의 삶의 활력을 통하여 삶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삶을 더 풍부하고, 다양한 욕망으로 가득 찬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여 들며,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수천 개의 우주의 화음과 리듬에 함께 하는지도 모른다.
[출처]전자감시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 |작성자신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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