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당신 ‘앓는 소리’ 해주세요, 우리는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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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조한진희의 잘 아플 권리
⑨ 질병의 언어
잘 아프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인데도
질병의 서사 전할 언어 못찾다가
‘아픈 몸’ 글쓰기 넘어 연극으로
다른 아픈 몸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사진은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나드·다리아·안희제·정지혜·목우·홍수영 출연, 허혜경 연출, 조한진희 기획)의 한 장면. 다른몸들 제공
언어가 고팠다. 몸이 아프던 초기, 나의 질병 경험을 설명할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질병서사에서 질병은 ‘선물’이거나 ‘절망’ 둘 중 하나였고, 나의 질병 경험은 둘 다 아니었다. 그러나 그 둘 다가 아닌 ‘무엇’임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답답했다. 흔히들 몸이 아프면 치료에만 매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통상 중증 질병을 진단받으면 처음에는 오진이 아닐까라고 의심하다가, 결국은 인정하게 된다. 동시에 자신에게 ‘왜 이런 질병이 왔을까’를 묻고 추적하게 되고. 생활습관, 스트레스, 종교적 깨달음, 환경 등에 대한 가설을 세우며, 질병이 온 이유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다가 질병이 장기화되면, 질문은 다소 바뀌는 듯하다. ‘왜 이런 질병이 왔을까’에서 ‘나에게 이 질병경험은 무엇인가’로 말이다.
나도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지속적으로 구했다. 그러나 변변한 언어를 찾지 못했고, 답답함을 넘어 고통스러웠다. 통상 언어가 부족하면 타인과 소통에서의 어려움을 떠올린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없을 때 인간은 스스로의 경험에서도 소외된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건강한 몸의 눈이 아니라, 아픈 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자 무겁게 짓누르던 고통에서 순간 해방되는 것 같던 느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동료들의 염려의 말이 내내 불편했던 게, 내가 속 좁고 문제적인 인간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 결국 우리 사회가 건강중심 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됐을 때의 쾌감을 아직도 선연히 기억한다.
아플 때 아프다고 이야기하기
그 언어를 갖기 이전의 경험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던지, 다른 아픈 몸들과 함께 그 혼란과 잘 아플 수 없게 만드는 경험을 절실히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2015년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시민교실에서 ‘질병과 함께 춤을: 잘 아프기 위해 필요한 몇가지 것들’이라는 긴 제목의 워크숍을 열었다. 워크숍을 진행했던 3년 내내, 우리가 온전히 아플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 돌봄, 의료 등도 중요하지만, 질병경험을 해석하고 설명할 ‘언어’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돌이표처럼 주기적으로 도달했다. 그리고 그 워크숍을 마무리하고 3년 전부터 후속 모임을 꾸렸고, 현재까지 ‘질병과 함께 춤을’이라는 이름으로 질병서사 쓰기 작업을 하고 있다.
당시 아픈 몸 동료들과 질병서사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일부 사람들은 매우 의아해했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굳이 모임까지 꾸려서 글을 쓰려는 것이냐고 했다. 나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혼돈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비슷한 말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호모 나란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서사)를 가진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질병을 겪는다는 것은 병명 하나가 삶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고, 일상에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익숙한 건강 안부 인사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내가 성격 파탄자라도 된 게 아닐까 의구심을 품게 되는 작은 악몽. 그 불편하고 이상한 경험을 해석해낼 언어나 이야기가 없을 때, 질병 자체가 불행한 일이고, 아픈 게 죄인이라는 감정으로 미끄러지기 쉽다.
다른 아픈 몸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사진은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나드·다리아·안희제·정지혜·목우·홍수영 출연, 허혜경 연출, 조한진희 기획)의 한 장면. 다른몸들 제공
우리는 질병 경험을 해석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며, 그렇게 글로 쓰는 작업을 해왔고 ‘질병과 함께 춤을’이라는 꼭지명으로 인터넷 언론에 연재 작업도 1년 넘게 했었다. 그런데 늘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저항적 질병서사를 글로 쓰는 작업은 질병을 겪으며 헤집어진 삶을 고요히 들여다보면서, 질병경험을 사회구조적으로 해석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건만, 글쓰기라는 행위는 때로 감정과 사고를 너무 빠르게 가지런히 만들었다. 더 복잡한 감정의 심연으로 들어가 좀 더 깊숙한 곳의 날것의 의식에 접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는 고민했다.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가 말했듯 아픈 몸들은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wounded storyteller)이며, 우리 이야기가 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발화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좀 더 잘 발화하는 몸을 만들어볼 수 있을까?
그리고 작년 봄 아픈 몸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을 모집했고, 글이 아닌 연극이라는 더욱 역동적인 형태로 질병서사를 써나갔다. 아픈 몸들은 연출자의 도움으로 무대 위에서 자신의 질병경험을 펼쳐냈고, 그렇게 저항적 질병서사로 만들어진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가 제작되었다.
물론 이번에도 아픈 몸들과 글쓰기라면 몰라도, 연극은 무리일 것이라는 비관적인 충고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픈 몸들을 건강중심 사회와 충돌해온 자신의 경험을 힘껏 말했고, 매우 미세하지만 명확한 균열을 전달했다.
“질병으로부터의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 자유를 원합니다.”
연극에서 나드가 외친 말이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수술, 재발, 재활 치료로 보냈고 고심 끝에 저 말을 외친다. 우리가 질병으로부터 생존한다는 것은 생의학적으로 사망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질병에 점유되지 않고 삶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게 또 하나의 핵심이다. 그는 언젠가 건강히 완치될 날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인생을 유예해왔던 삶을 벗어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닿을 수 없는 완치가 아니라, 아픈 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하고, 자유를 얻는다.
‘아프다는 말, 듣기 싫다’는 비아냥
그 혐오를 푸는 것도 질병권 운동
아픈 몸, 몸 둘 곳 없던 존재였지만
조금씩 그들만의 언어와 공간 늘어
몸 둘 곳 없었던 존재의 몸 둘 자리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었을 거야. 망상은 소외된 꿈들이 짓는 몹시도 뜨거운 희망!”
반복되는 강제입원과 살아가던 목우는 자신이 겪는 조현병의 주된 증세이자 비정상의 증표인 환청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현대 정신의학이 반드시 약물로 제거되어야 할 의미 없고 위험한 목소리로 규정하는 환청에 대한 해석을 완전히 전복했다. 진료실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면 의사들은 그야말로 ‘미친 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목우는 무대라는 가상의 안전한 공간에서,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자신만의 ‘해석’을 내뱉어본 것이다. (게다가 실제 이는 영미권 정신장애인 운동에서 진행 중인 목소리 듣기 운동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이처럼 아픈 몸들이 질병경험을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하고 발화하는 행위는 의사와 사회로부터 환자다움을 요구받고, 의료권력에 의해 식민화된 몸을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의학에서 치료되지 않는 몸은 ‘실패한 몸’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 지금 이 몸은 가장 ‘정상의 몸’일 수도 있다! 이 절박한 외침의 의미를 건강중심 사회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이처럼 거듭 확인하듯, 질병서사라는 것은 질병경험에 대한 자기 해석과 투쟁의 장이다. 질병경험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자괴감으로 미끄러질 수도 있고, 저항과 변화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저항적 질병서사를 귀기울여 들음으로써, 질병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담지할 수 있고, 아파도 괜찮은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아픈 사람이 아픈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며 비아냥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그 비아냥의 기저에는 건강중심 사회가 생성해온 질병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있으며, 그 혐오를 풀어내는 것조차 질병권 운동이 지난하게 풀어내야 할 무거운 숙제라는 것도 안다.
얼마 전 매우 낯선 곳에서 연락을 받았다. ‘백상예술대상’이었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가 연극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건강중심 사회에 절망했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이어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시민배우, 연출자, 스태프 그리고 이 작은 연극에 극성스러울 만큼 온몸으로 감응했던 관객들이 생각났다. 건강을 완전히 다시 사유하게 됐다며 관객들이 남겨주었던 메시지들을 다시 하나하나 읽었고, 관객들이 저토록 먼 대중적 공간까지 우리 연극을 이어주었다는 생각에 뭉클했다. 오랫동안 건강과 효율이 정의(justice)가 된 사회에서, 아픈 몸들은 몸 둘 곳이 없던 존재였다. 요즘 아주 조금씩 아픈 몸들의 언어가 들리기 시작하고, 아픈 몸들의 몸 둘 자리가 생기고 있음을 확인한다.
▶ 조한진희 여성·평화·장애 관련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페미니스트. 국제 현장 연대 활동에서 건강이 손상된 뒤 투병 경험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다. 공저로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비거닝> <포스트 코로나 사회>가 있다. 사회단체 ‘다른몸들’에서 활동 중이다. 아픈 몸을 둘러싼 사회·경제·정치적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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