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당사자 만났다면 그런 영화 못 만든다"
페이지 정보
본문
[인터뷰] 당사자 권용구·강욱성씨 "영화 'F20' 속 조현병 혐오 심각... 상영·방송 중단해야"
영화 속 한 장면. 어느 날 아파트 단지에서 불에 탄 고양이 사체가 발견됐다. 입주민들이 모여 끔찍한 사건의 범인을 유추한다. 주민들은 "엊그제 새로 이사 온 112호, 그 집 아들이 '그거'랍디다, 조현병"이라며 "이게 보통 위험한 병이 아니더라고"라고 수군거린다. "어휴, 어쩌다 그런 미친놈이 우리 동네로 이사 와서..."라는 주민들의 푸념이 이어진다.
얼마 전, 영화 <F20>을 관람한 강욱성(36)씨는 이 장면을 보고 펑펑 울었다. 19일 서울 관악구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그는 "마치 내가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너무 억울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환청이 들리는 증상에 시달리는 조현병 당사자이자 반려묘를 키우는 이른바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강씨는 "제작진이 조현병 당사자를 단 한 명이라도 직접 만났다면, 이런 영화는 못 만든다"라면서 "영화가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혐오를 부추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현병 당사자 강욱성씨.
▲ 조현병 당사자 강욱성씨.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지난 6일 개봉한 KBS가 투자‧제작한 영화 <F20>에 대한 조현병 당사자들의 반발이 거세다. 영화는 조현병 질병코드 'F20'을 제목으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현병을 소재로 삼았다. KBS가 단막극 시리즈 '드라마 스페셜'을 확장한 영화 프로젝트 'TV 시네마'의 첫 작품으로 TV방영도 예정돼 있다.
서울대생 아들의 조현병을 감춰온 애란(장영남)은 역시 조현병 아들을 둔 지인 경화(김정영)가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며, 자기 아들이 조현병이라는 게 들통날까봐 불안에 휩싸인다. 조현병 아들을 둔 두 엄마가 이웃들에게 눈총과 따돌림을 받으며, 결국 애란이 광기에 내몰리는 심리 묘사가 영화 내내 이어진다.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로 조현병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 이 영화를 두고 제작진은 개봉 전 간담회에서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 배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조현병 당사자들은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이 조현병 당사자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다"라고 지적했다.
"조현병, 사이코패스와 달라"
제빵사를 꿈꿨던 강성욱씨에게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린 건 10여 년 전, 그의 나이 스물여섯 때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의 귓가에 어느 날부터 신을 모독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찾아간 병원에서는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조현병은 다양한 원인에 의해 생각·감정·지각·행동 등 인격의 여러 측면에서 이상을 보이는 정신질환이다. 발병 원인과 진행 과정 등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과잉과 전달체계의 문제, 뇌 영역 간 구조적·기능적 연결 이상이 주된 요인으로 추정된다.
"조현병약을 먹으면 부작용으로 손발이 많이 떨려요. 침이 고이기도 하고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 큰 어른이 침을 흘리는 거죠. 그러니 인간관계도 점점 폐쇄적으로 되고, 사람들 앞에 설 자신이 없어져요. 그렇다고 영화에서처럼 아픈 걸 마냥 숨기는 것도 아니고 주위에서 알았다고 손가락질하지도 않아요. 우리는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니까요."
그는 영화 <F20>에서처럼 조현병이라는 게 주위에 알려졌다고, 미친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웃 주민 중 그의 병을 아는 사람도 있지만, 그의 가족에게 이사가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또 다른 조현병 당사자 권용구(39·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권씨는 군대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고 의병 전역했다. 그의 조현병 증상은 망상으로 드러났다. 권씨는 "작은 일을 크게 해석하고, 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필요 이상의 상처를 받으며 위축됐다. 자꾸 내 안으로 숨게 돼 주위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라고 증상을 설명했다.
▲ 조현병 당사자 권용구(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씨.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그렇다고 일상을 전혀 유지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조현병 진단을 받고도 7년 동안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니까요. 일하는 동안 손님이나 점장과 크게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고요. 다른 사람보다 걱정이나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이런 생각이 누구를 괴롭히고 싶은 것과 연결되지는 않아요. 아무 죄의식 없이 다른 사람·동물을 해하는 건 사이코패스잖아요."
이어 권씨는 "영화는 조현병 당사자나 정신질환자들은 잠재적 살인마로 삼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라고 강조했다.
KBS "조현병 당사자들 우려 충분히 고민하겠다"
▲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회원들이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F20’ 영화 조현병 혐오에 대한 KBS 규탄 및 상영중단을 촉구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결국 강씨와 권씨는 20일 "조현병 있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냐"며 영화를 제작한 KBS를 찾아갔다. 조현병 당사자를 비롯한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관계자들은 이날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 신관 출입구 앞에 모여 "<F20> 영화 상영과 KBS2 방영일정을 전면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강씨는 "오는 29일 <F20>이 KBS2에서 방영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동, 청소년을 비롯해 일반 대중이 쉽게 시청할 수 있는 지상파 공영방송에서 조현병과 살인을 연계한 작품을 방영하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씨 역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내 이웃에 조현병 당사자가 있을까 두려움에 떨 것"이라며 "조현병 당사자들은 이웃의 혐오가 두려워 집 안에 숨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경계와 혐오를 조장해 조현병 당사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려는 나쁜 영화는 당장 상영을 중단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 장애인단체 “조현병 혐오 조장하는 영화 ‘F20’ 상영 중단하라”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회원들이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F20’ 영화 조현병 혐오에 대한 KBS 규탄 및 상영중단을 촉구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이들과의 면담 후 KBS도 방영을 고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KBS 관계자는 기자회견장을 찾아 "조현병 당사자들의 우려를 100% 공감한다. 차별 편견을 넘어 공영방송의 역할을 다하겠다"라면서 "의도와 다르게 조현병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 제작 책임자에게 이를 전달하겠다. 조현병 당사자들의 요구가 원만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설명했다.
인터뷰 말미, 강씨와 권씨는 조현병 증상은 악화가 아니라 완화된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강씨는 2018년부터 3년여 환청을 듣지 못했다. 그는 "스트레스가 좀 심해질 때 환청이 들리는 경향이 있지만, 환청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나만의 방법도 생겼다"라면서 "물론 약도 먹지만, 나 스스로 내 병을 인식하며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현병 당사자들을 위한 단체인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소장으로 일하는 권씨 역시 "내 생각이 과대망상으로 이어지지 않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의견을 묻는다. 여러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 속에서 20여 년을 이어온 증상이 나아지고 있다"라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관련링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