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아이', 시설 그 자체가 인권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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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한 강제감금 시설, 인권침해 왕국 & 권력 ]
2012년 5월께 한종선(37)씨는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섰다. 25년 전 자신이 겪은 부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전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언론사, 인권단체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말은 ‘공소시효가 끝났다’였다. 고민하던 한씨는 결국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당시 3164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시설이었다. 불법감금·폭행·강제노역 등 인권침해로 그때까지 12년간 51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원장이었던 박인근씨가 불법감금과 국가보조금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1987년 1월. 그러나 비슷한 시기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달리, 반짝 주목받고 사라졌다. 경찰과 검찰은 형제복지원 인권침해를 수사하지 않았고, 법원은 박 원장의 형량을 계속 줄여줬다. 같은 해 6월30일 복지원 폐쇄로 뿔뿔이 흩어진 피해자들은 ‘부랑자’라는 낙인과 공포의 기억 속에 입을 닫았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가 다시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이 사건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작은누나는 형제복지원에서 병을 얻어 지금까지 정신병원에 있다. 자신은 세번 감옥살이를 했다. 그 뒤 일하다 허리를 다쳐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가족의 불행을 아버지와 운명 탓으로 돌렸던 그는 이제 그 책임을 형제복지원과 국가에 묻고 있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지난달 27일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중략)
김용원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변호사)는 우연히 형제복지원의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거물이었다. 그는 1981년 4월 국민포장, 1985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데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이었다. 예상대로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박 원장 구속 다음날 부산시장이 ‘빨리 석방해야 한다’고 전화를 했다. 복지원 수용자 전원을 대상으로 구타 등 가혹행위, 강제노역 여부 등을 조사하러 울산 경찰관 30명을 보냈지만 부산지검 차장검사의 지시로 철수했다. 수사를 못하게 하니 내가 밝혀낼 수 있던 건 정부 보조금 횡령이었다. 그렇게 85~86년에 박 원장이 횡령한 11억4254만원을 찾아냈지만, 이마저도 검찰 상부의 지시로 6억8178만원으로 축소해야 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이 동시에 터져 부담을 느꼈던 전두환 정권 차원에서 이 사건을 묻으려 했었다.” 김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업무상 횡령, 특수 감금 등을 적용해 박인근 원장 등에게 징역 15년, 벌금 6억8178만원을 구형했다. 당시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불법 감금 등을 인정하고, 징역 10년에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했다. 형량과 혐의는 계속 줄어들었다. 대구고등법원은 징역 4년, 벌금 없음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보다 낮은 2년6개월형을 확정했다. 게다가 대법원은 “법령에 근거한 정당한 직무수행”이라며 특수 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대법관 중의 한명이 헌법재판소 소장을 지낸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다.
[전문] 살아남아 싸우는 아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10460.html
[관련기사] 시설, 그 자체가 인권침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104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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