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저널] 정신장애인에게도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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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에게도 삶이 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를 배제하는 정신건강복지서비스의 현실
2019년 4월 17일 발생한 진주 방화사건 이후, 다수의 강력범죄 사건들이 ‘조현병 범죄’를 연상케 하는 제목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런 보도에서 망상, 환청, 환각 등 조현병의 증상들은 그 자체로 범죄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처럼 다뤄진다. 그러나 범죄율과 관련된 자료들은 이와 같은 인식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한다. 2016년 대검찰청 범죄분석에 따르면 비정신장애인의 범죄율(1.4%)은 정신장애인의 범죄율(0.1%)보다 약 15배 높다. 강력범죄로 범위를 축소하더라도 정신장애인의 범죄율(0.05%)은 비정신장애인의 범죄율(0.3%)의 6분의 1에 그친다. 2018년 미국 의학회지(JAMA)에는 오히려 정신장애인이 폭력 등 강력범죄의 대상이 될 확률이 더 높다는 연구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정신장애는 곧 범죄’란 왜곡된 인식은 범죄의 책임을 정신장애인 개인에게 돌린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범죄 발생의 원인은 정신장애인이 조기에 치료를 받지 않았거나 치료 중 임의로 약물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제입원을 늘려야 한다는 해결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 속엔 정신장애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지에 대한 고려는 없다.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의 정신보건 실태를 짚어봤다.
정신장애인의 치료와 독립 막는 사회
정신질환 조기치료에 대한 질문에 정신장애인 당사자 단체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이정하 대표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언급하며 “범죄자로 몰아갈수록 (정신장애인은) 혐오적 집단이 되고, 그러면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회에선 조기치료 부재 문제를 허술한 정신질환 관리와 연결짓지만 실제 당사자들이 느끼는 문제는 사회적 편견이란 설명이다. 병원에 가서 진단명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 순간 “주변 사람들과 당사자는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리”되고, 당사자에게 치료는 사회적 낙인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병원치료가 강요되면 당사자는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치료상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조기치료뿐이 아니다. 일각에선 퇴원 후 치료중단을 문제로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은 왜 통원치료를 계속하길 꺼리는 것일까. 개방병동 입원 중 외출해 인터뷰에 참여한 파도손 박은정 활동가는 개방병동으로 옮기기 전 2주간 폐쇄병동에 입원했다. 그는 자의로 입원해 치료 효과를 느꼈음에도 당시를 부정적으로 기억했다. 박 활동가는 “(한 환자가) 의료진의 치료방식에 불만을 표시했다가 폐쇄병동 내 CR(Care Room; 폐쇄병동 내 개인병실)에 끌려가 안정제를 맞았다”며, “치료가 아닌 징벌을 위한 듯한 행태에 슬펐”고 자신도 “CR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공포가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나아가 박 씨는 자신이 입원했던 폐쇄병동서 필요성과 상관없이 환자에게 풍선 불기 활동을 시키기도 했다며 획일적인 조치에 불만을 표했다.
책《나는 정신장애인이다》중 일부. 작가의 폐쇄병동 입원경험이 담겨 있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이정하 대표
한층 근본적인 문제는 당사자들이 폐쇄병동에 공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입원 당시 경험에 대해 묻자 이정하 대표는 파도손 당사자 네 명의 경험이 담긴 책 《나는 정신장애인이다》를 건넸다. 해당 책엔 “울면서 애원을 했지만 거기 더 있으라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한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 그곳에서 퇴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당사자의 회고가 적혀 있었다. 2016년 용인정신병원 등 정신병원의 인권유린적 실태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면서 치료환경 개선 움직임이 있었지만 당사자들의 입장에선 턱없이 부족하다. 당사자들은 과거의 입원경험으로 퇴원 후 응급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병원 혹은 가족에게 연락하길 꺼리고 더욱 고립된다.
약물 부작용의 경험 또한 당사자들을 치료에서 멀어지게 한다. 정신과 약물은 단기적으로는 증상을 효과적으로 완화시키지만 졸음, 집중력 감소 등의 부작용이 있어 중증질환자의 경우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약물치료 외 심리치료 등의 방법을 시도하고자 해도 접근성이 낮다. 병원 내 심리상담은 형식적 심리검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병원 밖에선 상담비가 지원되지 않는다. 파도손 원세희 활동가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상황을 “적과의 동침”이라 묘사했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이정하 대표 ⓒ왕익주 사진기자
당사자들은 관리의 대상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이정하 대표는 정신질환이 진단되면 당사자와 가족의 관계는 많은 경우 관리와 통제의 관계로 전환된다고 말한다. 주변인들은 당사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기보단 행동을 제어하는 데 집중한다. 이 대표는 “가정폭력 등 가족관계의 모순으로 정신질환이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무조건 가족이 옳고 ‘정신병자’는 틀리단 식으로 관계가 형성되고 대화는 단절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정부가 정신보건 정책에 ‘정신질환자 사례관리’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도 반감을 표했다.
오히려 정신장애인이 원하는 것은 사회적 자립이다. 이들은 독립된 주거에서 생활하며 직장을 갖고 직접 생활비를 벌길 원한다. 하지만 지역사회엔 정신장애인이 살아갈 자리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이들이 장기입원 후 사회에 돌아왔을 땐 이미 자립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제공하는 주거지원 및 직업재활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지원액 등이 부족해 실질적 자립으로 이어지긴 힘들다. 이정하 대표는 “정신장애인들이 스스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게 치료 면에서도 사회적 비용 면에서도 나을 수 있다”며 정신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사회적 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신건강복지서비스 기조는 ‘탈원화’ 돼야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은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협약의 기본정신은 장애를 병리적 질환이 아닌 사회심리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장애인 개인의 신체적 불능에 주목하기보단 그들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도록 사회가 노력하고, 결과적으로 장애인이 자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기초해 제시된 정신장애복지의 중요한 흐름이 ‘탈원화’다. 정신장애인의 치료는 병원 밖, 즉 지역사회에서 수행돼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 녹아들어 살아갈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우리나라 또한 2009년에 협약을 비준한 바 있다.
그러나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나라의 현실은 탈원화와는 거리가 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4년 권고안은 한국의 정신건강복지서비스가 ‘정신병원에 의해 독점된 장기입원 중심의 시설화 모형’이라고 평가했다. 2016년 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입원기간은145.7일로 영국(37.7일), 독일(25.1일) 등 다른 OECD 평균보다 길며, OECD의 2018년 통계는 우리나라의 정신과 병상 수가 인구 천 명당 1.25개로 36개국 중 5위라고 밝히고 있다. 유엔 건강권 특별보고관이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한 특별보고서 또한 환자가 동의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강제입원을 근절하고 지역사회중심의 치료를 구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한국의 정신질환 평균 입원기간은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3배 이상 길다. ⓒOECD
정신장애인인권연대 권오용 대표는 현재 정신건강을 위한 예산이 의학적 치료에만 집중돼 있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 거주·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정신의료기관의 예산은 건강보험과 의료급여를 합해 4조 2천억원이었던 데 반해 병원 외 치료, 응급서비스, 주거 및 직업재활을 포괄하는 지역사회서비스 예산은 2017년 기준 1,890억원에 그쳤다. 권 대표는 이처럼 편중된 예산이 정신장애인의 치료선택권을 제한하고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구조를 만든다며, OECD 권고에 따라 “병원으로 가는 재정은 제한하고 지역사회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급성기 환자에 강제입원보다 응급위기대응체계 마련해야
정체된 탈원화 논의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급성기 환자에 대한 대응방안, 즉 비자의입원 절차에 대한 논의다. 급성기란 정신장애인의 환각, 환청, 공황발작 등의 증상이 극단적으로 심해지는 때로, 이 시기엔 자·타해 위험에 대한 신속한 대처가 요구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4촌 이내 친족이나 동거인이 비자의입원을 신청하고 사법기관이 결정하는 ‘사법입원제’ 도입을 주장한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은 환자의 자·타해 행위 등에 대한 보호의무를 가족에게 부과하고, 주요 비자의입원 경로인 보호입원 또한 가족의 신청에 의존한다. 이처럼 가족의 판단책임이 큰 정책 기조에 대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백종우 정신보건이사는 “핵가족화의 흐름 속에서 사회에 방치되는 중증환자가 증가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현재 보호입원을 결정하는 주체가 정신건강전문의인 것은 인신구속적 결정을 과도하게 민간에 전가하는 측면이 있어 국가가 입원결정을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정신건강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판사 인력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사법입원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인권연대 권오용 대표는 “(병원치료 외) 대안이 없는데 사법입원제만 도입되면 한국 정신건강시스템이 계속 시설을 유지하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비자의 입원제도 개선 중심의 논의를 비판했다. 그는 문제의 근본 원인은 환자가 입원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역사회 정신건강서비스의 부재로 치료의 연속성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사진4.JPG정신장애인인권연대 권오용 대표 ⓒ왕익주 사진기자
권오용 대표는 급성기 환자에 대해서도 강제적인 입원조치보단 환자와 가족이 빠르게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응급위기대응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는 의사뿐 아니라 경찰, 응급구조대,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응급대응팀인 ACT(Assertive Community Therapy) 팀이 위기상황 시 출동해 대처하고 병원에서 안정화 후 24시간 내 퇴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이런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신보건에 관한 일련의 논의가 지역사회서비스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주된 이유는 정신건강정책결정을 위한 협의체에 다양한 주체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오용 대표는 “간담회 등이 대부분 정부관계자와 정신과 전문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디아니우스 푸라스 유엔 건강권 특별보고관 역시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열린 ‘21세기의 정신건강과 인권’ 심포지엄에서 정책 논의에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의견이 한층 더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가 정신장애인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도손 이정하 대표는 당사자들이 급성기 후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을지로의 파도손 위기쉼터를 언급하며 “응급상황으로 소란이 일어나면 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등 건물 사람들은 정신장애인을 가까운 이웃으로 배려한다”고 말했다. 을지로에서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것처럼, 정신장애인을 격리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회적 인식변화를 기초로 지역사회시스템을 강화할 때, 진주 방화사건과 같은 사회적 비극을 방지할 수 있다.
출처 : 서울대저널(http://www.snujn.co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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