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박재찬] 찍히면 끝장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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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 조세형은 자기 이름 앞에 ‘대도’가 붙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고 한다. 몇 해 전 그의 부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조세형은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유명한 절도범이었다. 주로 고위층의 저택에서 금품을 털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해서 대도로, 때로는 ‘현대판 홍길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15년간 수형 생활을 마치고 종교에 귀의하면서 새 삶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죄목은 절도죄였다. 병적인 도벽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많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그를 ‘새 사람’으로 봐주지 않은 탓도 있는 것 같다. 그가 출소한 뒤 여기저기 간증 활동을 할 때도 전단지나 플래카드에 들어가는 그의 이름 석 자 앞엔 늘 대도가 수식어처럼 따라붙었다.
개과천선한 인생으로 마무리가 됐으면 좋을 텐데, 얄궂게도 그의 삶은 아직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절도 혐의로 또 구속됐다. 출소 10개월 만에 다시 범죄자로 전락한 그의 나이는 81세. 절도 혐의로 붙잡힌 것만 16번째다. 다세대주택에서 5만원도 들어 있지 않은 저금통을 훔쳤다는 얘기에 대도라는 수식어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사 가운데 열에 아홉은 대도를 붙여 그를 설명했다.
그의 기사들을 접하면서 죄를 범한 자는 분명 조세형이지만, 우리 사회가 그를 끊임없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있는 건 아닌지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낙인 효과’ 같은 것이다. 부정적으로 낙인이 찍히면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심리학 용어다. 낙인은 그리스어인 스티그마(Stigma)에서 비롯됐다.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쇠 인장을 불에 달궈 가축의 몸에 찍는 화인(火印)을 말한다. 낙인 효과를 ‘스티그마 효과’라고도 한다.
낙인 이론은 범죄자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가설이다. 이 이론을 주창한 미국의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에 따르면 처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으면 결국 스스로 범죄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재범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조세형은 자기 이름 앞에 붙는 대도라는 수식어가 평생 지울 수 없는 화인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둘러보면 낙인찍기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번지고 있다.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가 부각되면서 ‘조현병 환자=잠재적 범죄자’처럼 보는 시각이 있다. 우울증 환자도 언젠가 큰일을 저지를 사람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신뢰를 잃은 기업은 다시 일어서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과거의 부정적인 이력 때문에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청년 취업 현장에서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가령 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동일한 조건에서 취업 경험 유무만을 남겨뒀을 때 취업한 적이 없는 응시자에게 결격 사유가 있는 건 아닐까 미뤄 짐작하는 것이다. 낙인찍기가 일으키는 사회적 폐해는 가짜뉴스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취업자들의 구직 활동을 소극적으로 만들 수 있다. 치료를 받고 있는 정신병 환자들은 사회적 편견 때문에 더 움츠러들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재기와 새 출발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는 활력을 잃는다. 오늘도 스마트폰으로 시시각각 쏟아지는 ‘낙인 뉴스’에 무심코 맞장구를 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니 돌아봐야 한다. 누구에게나 지울 수 없는 화인을 새기는 비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찍히면 끝장인 세상에서 새 출발, 패자부활전이 있을 수 없다. 한번 찍혀도 끝장이 아닌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그 사람 잘 해내겠지. 이겨내겠지. 나아지겠지’ 하는 북돋아주는 마음이 모아져야 할 때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7375&code=11171222&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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