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미의 낮은 목소리] "한 사람을 돌보는 데 온 세상이 귀기울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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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고통에 손 내밀어주고 격려해주었다면
아픔에 공감해주었다면 마음의 동굴로 피하지 않았을 것
정신요양시설, 무조건 존재 부정당해서는 안 돼
기존 체제 전면 백지화보다 창조적으로 다듬고 만들어야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정신으로 당사자 행복 찾도록 도와야
그때 누군가 옆에 있었더라면
만성정신장애인이 살고 계시는 정신요양원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각양각색의 사연과 이력을 가진 분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삶의 흔적들을 가지고 계신 분이 많으시죠.
저희 요양원에 살고 계신 하아무개 님은 아주 독특한 습관이 있습니다. 식사 시간에 꼭 자신의 배식판에 담으신 따끈한 음식은 옆자리 사람한테 싹싹 긁어 줘 버리시고 본인은 퇴식구에서 서서 기다리다가 다른 분들이 식사를 다하고 식판에 남긴 음식을 낚아채서 가져가 드십니다.
도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실까 싶어 직원들이 설득도 해 보고, 먹다 남긴 밥처럼 보이면 드실까 싶어 일부러 하얀 밥에 김치국물을 살짝 흘려 보기도 했습니다. 퇴식구에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분이 오시면 식판에 밥을 새로 담아 살짝 올려놓기도 해봤습니다.
빵도 사서 드려보고 설득도 해 보고, 직원이 생각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무용지물.
오히려 그렇게 속임수(?)를 쓰는 직원은 꼬집히거나 식판에 맞기도 할 정도로 호되게 응징(?)을 당했지요. 그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저러실까 하는 의문만 안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왜 그런 행동을 하시는지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연세대학교 법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고 계셨던 하아무개 님은 장래에 유능한 판사나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기대받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유능한 실력과 학업을 받쳐주기에는 집이 너무나 가난했고, 그분께서는 부모가 없는 동생들의 생활까지 책임지면서 고학을 하셔야 했답니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부모 대신 동생들을 돌보아주고, 밤에는 밤새도록 공부를 하며 고시를 공부해야했던 그분께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비정했을까요.
기댈 곳 하나 없고, 손 내밀어 줄 이 하나 없는 세상에서 그렇게 공부와 살림을 감당해야했던 현실과 극에 차오른 스트레스를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결국 그분은 조현병이라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발병한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굶어도 동생들은 밥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본인이 드셔야 할 밥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 다 퍼주고 본인은 남이 먹다 버린 밥만 건져드시는 거지요. 결국 아직도 그분은 퇴식구에서 다른 식구들이 반납하는 식판만 바라보고 계십니다.
식사 시간마다 '배식구'가 아닌 '퇴식구'에 멀뚱히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그 분. 바라볼 때마다 참 마음이 먹먹합니다. 저 분의 어머님이 하늘에서 아들의 저 모습을 보신다면 어떤 심정일까 싶은 생각이 들지요.
정신요양원에는 저런 기막힌 사연을 가지신 분이 꽤 계십니다. 손꼽히는 약대를 나오신 분, 대통령상을 받은 우수 소방관, 미술을 가르치던 원장, 이대 영문학과 졸업생, 평생을 발레리나로 사셨던 분, 시인 등단을 하신 분, 연극배우, 부모가 둘 다 저명한 교수의 아들 등등. 사회에서 만났으면 필자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의 스펙과 환경을 가지신 분들이신데 말입니다.
팍팍한 삶을 살다 만나게 된 바람 앞에 휘청거렸던 그 순간, 누군가 그 손을 잡아주며 부축해주고, 그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 일어나라고 격려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아픔에 공감해줄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그분들이 그렇게 동굴로 너무 깊게 들어가 다시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진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어 바라볼 때마다 먹먹합니다. 이제 너무 깊은 동굴로 들어가버려 그 동굴이 그 분들의 삶이 되어버린 거지요.
전국의 정신요양원에 계신 분들은 90% 이상이 그런 분들입니다. 너무 깊은 마음동굴 속으로 들어가셔서 되돌아 나올 길을 잃어버린 분들.
다르지만 같은, 각자의 사명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서 크고 작은 바람을 만납니다. 그 바람을 견딜 만큼의 힘이 있는 분들은 금방 회복이 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이거나 이길 힘이 적은 분들은 아예 그 바람 앞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럴 때 각자의 모양으로 다르게 돕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정신건강복지계 내의 여러 가지 사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병원은 정신병원의 모양대로, 정신재활시설은 그 필요성과 모양대로, 당사자 단체는 나름의 정체성과 모양으로, 또 정신요양시설은 정신요양시설의 모양대로 말입니다. 실제로, 각자 나름대로 그 서비스를 이용하셔야 할 분들, 존치해야 할 이유, 필요성이 각기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운영되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없애는 것은 우리에게 이득일까요, 손해일까요.
지난해 12월, 고(故) 임세원 교수님의 안타까운 사건으로 세상은 정신건강복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신건강복지계를 둘러싼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었지요. 정신요양시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故) 임세원 교수님의 사망 사건이 시발점이 돼 발의된 윤일규 의원의 정신건강복지법 일부개정안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 치료기능이 없는 정신요양시설을 정신건강증진시설에서 삭제하여 일정한 유예기간동안 개방형 사회복지시설로 전환함.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첫째로 안타까운 점은 정신요양시설이 정신병원처럼 치료를 하는 곳으로 인식되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강제입원, 비자발적 억류 등과 같은 사회적인 오인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회복지시설을 의료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으니 제기능을 못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부분은 일전에 기고한 기고문에도 나와있으니 각설하겠습니다.
둘째로 안타까운 점은, 왜 우리나라는 정권이나 정책이 바뀌면 무조건 이전에 있던 것들을 없애고 새로 만들려고만 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정신요양시설을 무조건 없애는 게 답일까요? 그러면 전국에 계신 오갈 곳 없는 1만여 명의 중증정신장애인들은 어디로 가셔야 할까요. 하다못해 입다 헤진 청바지도 그냥 버리지 않고 리폼해서 활용하고 사용하는데, 몇십 년 동안 예산을 투자해 진행했던 사업을 어찌 쉽게 포기할 생각을 하는지 말입니다.
사족입니다만, 탈시설 정책에 따라 무조건 그분들을 4~5명 단위로 묶어 지역사회로 보낸다 하여 중증정신질환자 본인과 사회가 원해왔던 만큼의 행복이 이루어질까요?
예를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더러 혼자 나가서 살라고 하면 그 아이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것일까요? 독립하고 싶어하는 청년에게 엄마랑 꼭 같이 살라고 하면 청년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명목으로 잘했다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겠지요.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의 특징, 돕기 위한 사람들(인력), 정책, 재정, 전달체계 등 수많은 것들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 세상이 갑자기 유토피아가 되어 갑자기 확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우리는 있는 제도들과 환경들을 잘 다듬고 만들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도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에서 정신건강복지의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없애지 말고, 있는 것을 더 이쁘고 아름답게
살면서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바람을 만나 넘어졌을 때, 병원이나 정신재활시설, 자조모임 등을 통해 도움을 받고 일어설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가장 좋은 회복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치료 시기를 놓쳐 평생을 느린 마음으로 사셔야하는 분들은 정신요양시설에서 느린 시계에 맞추어 사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그 분에게는 제일 행복한 도움이니까요.
하지만 정신요양시설에 몸담고 있는 저로서도 정신요양시설이 고쳐나가야 할 점이 많이 있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도와드릴 수 있는 인력입니다.
성경 말씀의 한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마음을 앓고 있는 분 한 명을 위해 지원돼야 할 인력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가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중략)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마가복음 2,1-12)
참 아름답지 않나요? 쓰러진 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네 명의 친구가 같이 와 준 것도 모자라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다니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글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지는, 감동 충만한 장면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 정신요양원에 계신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지는 멀쩡하게 존재하지만 사지가 없는 것처럼 사셔야 하는 중증정신장애인들. 이분들을 돕기에 필요한 사람은 그 한 사람보다도 많아야 하지 않을까요?
노인, 장애인 등 약자들의 거주시설 인력지원 현황을 보면 종사자 1명 당 대상자 2명~14명으로 다양합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으셔야 할 분들은 사실 1대 1 케어로도 힘든 상황이지요.
너무나 공상 같은 이야기이고 현실적으로(특히 예산적인 부분)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하시겠으나, 저는 종사자 한 명이 여러 명을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마음을 앓고 계신 분 한 명에게 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정말 온전한 돌봄과 지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꼭 나라나 단체에서 급여를 받는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원봉사자나 종교단체의 선한 마음에 읍소해보는 방법도 있겠고,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하는 결연사업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아직은 선언적인 성격으로 보여지는 커뮤니티케어 정책도 실제로 정착이 잘 돼 잘 활용되어진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자세한 방법이나 계획은 우리 모두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겠지만, 저는 이 세상에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고, 아직은 선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진=백윤미
사진=백윤미
뜬금없이 왠 화장실 스티커가 글에 올라왔느냐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 며칠 전 지하철 역 화장실 문에 붙어있던 이 스티커를 보면서 마음을 앓고 계신 당사자들이 퍼뜩 생각났습니다. 과도한 직업병이다 싶어 저 스스로 픽하고 웃었지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서는 온 세상이 귀를 기울여야 맞는 게 아닐까요. 종사자 1명 당 당사자 14명을 도와드리는 세상이 아닌, 종사자 14명 당 당사자 1명을 도와드리는 꿈같은 세상이 오길 꿈꿔봅니다.
둘째는, 규모입니다.
마음을 앓고 계신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음속에 두려움이 많습니다. 내면에서 들리는 여러 가지 목소리만 들어도 버거운 상황인데, 주변에 나 말고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오십 명, 백 명씩 있다면 상당히 피곤하겠지요.
실제로 정신요양원에는 환청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이 많은데 마음속에 있는 다른 목소리나 그림들과 싸우는 모습을 옆에 계신 분이 오해하셔서 싸움이 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인에게 하는 욕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환청과 싸우고 계시는 분 바로 옆에 피해망상이 있으신 분이 나란히 앉아계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시지요?
페이스북 친구이신 당사자 박아무개 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병원에서는) 환자들 간의 다툼, 환자들 사이의 관계의 역학관계를 인지하고 있고 평가하고 있으면서도 해결은 해주지 못합니다. 그 부분이 치료에 아주 중대한 변수, 요인이 될텐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방치된, 박해된 사람들이 모인 폐쇄병동에는 병동 자체의 스트레스가 아주 많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치료에 해로운, 불필요한 스트레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 글은 병원의 이야기이지만, 한 공간에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정신요양시설도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에 대한 연구를 볼까요. 모르는 사람끼리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적 거리는 360cm 이상, 친분이 없는 사람과 이야기해야 하는 사회적 거리는 120~360cm, 서로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 개인적 거리는 50~120cm , 애인이나 배우자처럼 친밀한 거리는 50cm라고 합니다.
현재 정신요양원에 같이 사시고 계시는 분들은 서로 같이 살긴 하지만, 식구가 워낙 많다보니 개인적 거리라기보다는 사회적 거리에 가까운 인연들입니다.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렇지요.
더군다나 관계로 인해 받은 상처로 사람과의 만남이 많이 조심스러운 정신장애인들에게 배려되어야 할, 사람과 사람간의 생활 간격은 어느 정도 될까요? 아주 넓은 공간이 필요하겠지요.
이처럼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거리나 개인적 병력 등을 고려해 이분들이 마음 편히 푹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배려와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이외에도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전달체계의 한계, 입퇴소 유형의 개혁, 종사자의 전문성 교육, 당사자 임파워먼트, 지원 체계와의 연결 등 풀어나가야 할 숙제는 산적해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정신요양시설은 사각지대에 계신 분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운운하며 없애려하기보다는 있는 것을 예쁘고 아름답게 리모델링하여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본연의 몫을 건강히 감당할 수 있도록 되어져야 합니다.
대한민국민 오천만 명 중 똑같은 시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빠른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느린 시간 속에서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사자가 각자의 시간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면서 살 수 있도록, 돕는 자가 각자의 환경 속에서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면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하게 되길 바랍니다.
백윤미 사무국장
백윤미 서울정신요양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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