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살다 죽어라” 말 남기고 엄마는 다시 오지 못했다 [이슈&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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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의 한 정신요양시설에서 지내고 있는 생활인이 지난 13일 창살이 박힌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윤성호 기자
[출처] - 국민일보
2013년 6월 30도를 웃도는 때 이른 폭염이 찾아온 날 서울에 살던 남자는 동생과 함께 교외로 향했다. 챙겨온 짐은 주민등록증과 통장, 도장뿐이었다. 입고 있던 여름옷 외에 여벌옷은 따로 챙기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곳’에서 주는 옷을 입으면 된다고 들었다.
“너는 더 이상 사회에서 생활이 힘들 것 같으니 그냥 거기에 들어가 있어라.”
암 말기 진단을 받은 어머니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병세가 심각해져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더 이상 그와 함께 살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그곳이 집이라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조상진(가명·55)씨는 정신요양시설에 입소하던 날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씨의 어머니는 그가 시설에 들어온 뒤 얼마 안 돼 숨졌다. 40대 후반 정신요양시설에 입소한 뒤 그는 8년째 “그곳에 있으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가족이 먼저 무너져내렸다
조씨는 1980년대 서울의 한 사립대 경제학과를 나와 대형 은행에 입사했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갑자기 병이 찾아왔다.
“은행 업무는 정확해야 하거든요. 조금만 잘못해도 금융 사고가 나요. 당시는 주판을 썼는데 저는 잘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어머니는 좋다는 병원을 다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는 등록금 대려고 공사장 일을 하다 허리가 부러지셨고, 막내는 병으로 죽었어요.” 이미 빈곤한 가정에 조씨 상황까지 덮치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있던 집도 다 팔고, 전축도 다 팔았습니다.”
병원을 전전하던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 어머니는 암을 얻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고 함께 살 사람이 없어지자 선택지는 시설밖에 남지 않았다. 동생이 한 명 더 있지만 자신을 보살피려면 그 역시 모든 걸 포기해야 했다.
“나가고 싶은데, 그 이야기를 못해요. 여기서는 사는 재미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나가겠다는 말이 좋은 이야기도 아니니까….” 조씨는 모든 걸 체념한 듯 그렇게 말했다.
조씨와 닮은꼴 인생은 그의 옆방에 살고 있다. 최민규(가명·59)씨는 20살에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그 뒤 30년 가까이를 병원 입퇴원과 외래진료를 반복하며 살았다. 여름철에 특히 짜증이 늘었고 가정 내 큰 행사가 있을 때 예민해졌다. 가족은 증세가 심해지면 병원에 입원시키고, 조금 수그러들면 퇴원시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2년 전 아버지가 별세했다. 어머니는 파킨슨병이 와 요양원에서 지내게 됐다. 돌봐줄 사람이 모두 사라지면서 큰형이 그를 정신요양시설에 데리고 왔다.
“어머니는 저랑 같이 못 살잖아요. 그래서 (저한테) 여기 와서 쭉 살다 가라고 형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여기서 살다가 죽어라. 여기가 집이다’ 그래서 왔어요. 바깥에선 살 수 없으니까 여기 사는 거죠. 오고 싶지 않았는데 운명이라니까 받아들여야죠.”
호리호리한 체형의 그는 어깨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그 이야기를 꺼냈다. 짙은 눈썹 위 이마에 굵은 주름이 선명했다.
최씨가 조씨와 다른 점은 이미 가족이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조씨는 가끔 동생을 만나지만 최씨는 입소 후 형제들과 연락이 끊겼다. 최씨가 입소한 뒤 형수가 한 차례 면회를 왔지만 이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무연(無緣) 인생의 원인
시설 신참급인 조씨와 최씨 사례는 정신질환자의 삶이 시설로 이어지게 되는 전형적인 케이스다. 정신질환이 발병되면 국가와 사회는 가족들에게만 책임을 지운다. 한국에서 정신장애인과 가족들을 위한 사회적 지지 체계는 거의 없다. 환자 치료와 돌봄에 매달린 가족들은 곧 가난의 굴레에 빠지고 탈진한다. 보호자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외톨이로 남겨져 시설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인터뷰에 동의한 입소자의 기록을 살펴보니 이 같은 슬픈 경로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정신병원이나 정신요양시설에서 평생을 보낸 이의 인생은 새끼손가락 정도 되는 두께의 서류에 담겨 초록색 파일철에 정리돼 있다. 이름과 나이, 주소, 출생지 그리고 진단명 등 정보와 그동안 떠돌아다닌 여러 병원의 재원기간, 상담 내용 등이 그의 인생 기록이다. 여기에 가족들의 이름과 연락처도 적혀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위로 빨간 줄이 하나씩 덧칠해졌다. 시설에서 생활이 장기화되면 부모는 늙고 병들거나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나마 있던 다른 가족과의 연대 역시 점차 희미해지는데, 이때 끊긴 연락처 위로 줄이 그어지는 것이다.
98년 입소해 23년째 시설에 있는 전정인(가명·69)씨도 그랬다. 그는 오래전부터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모가 그를 뒷바라지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40대 중반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가 주변 이웃들에게 발견됐다.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여기에 오게 됐어요.”
배다른 형제들과는 입소 전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나마 지지 체계가 있었던 이모도 점차 면회 오기가 버거운 나이가 됐다. “연세가 많아서 오시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게 결정하면서 그는 무연고자가 됐다.
긴 시간 시설에만 지내면서 보인 심경의 변화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퇴원을 언제 하느냐” “퇴원해야 하는데 이모님이 안 오신다”던 초기 상담 내용은 “가족이 없어서 이젠 여기 살아야 해요”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식물인간 비슷하게 사는 거지. 어떻게 보면 방치 같기도 해요. 사회복지시설 실태조사 자료를 읽어봤는데, 거기 보면 우리나라 정신보건체계가 ‘수용 위주’라고 나와요. 이런 수용 위주의 시설에서는 10년이든 20년이든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서 사는 거죠.”
전씨는 양팔을 꼰 채 별다른 미동도 없이 남 이야기 하듯 제 처지를 설명했다. 문제는 알겠는데 뾰족한 수가 없어 답답한 듯했다.
같은 건물의 다른 입소자들은 그 복잡한 심경을 감정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조상진(가명)씨가 지난 13일 정신요양시설 복도를 걸어가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윤성호 기자
‘6시 내고향’
“그거 보면 고향 생각이 절로 나요. 제가 살던 곳도 가끔 나오는데 옛날 생각이 나죠.”
13년째 시설 거주 중인 홍기덕(가명·57)씨는 오후 5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반드시 하는 일이 TV프로그램 ‘6시 내고향’을 시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홍씨는 인생 대부분을 병원과 시설에서 보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땐 뇌막염을 앓으면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병원을 전전했었다.
“뇌막염에 걸려가지고 초등학교까지밖에 못 다녔어요. 아픈 학생을 누가 받아주나요? 뇌막염 고친다고, 청량리 병원에서 5년, 전주 ○○병원에서 5년, 안동 △△병원에서 5년….” 그는 옮겨 다닌 병원의 이름과 지역명을 읊어 내려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이름이 채워야 할 공간을 병원 이름이 대신했다.
15살 무렵 하반신 마비까지 왔다. 그 뒤로 불안 증세를 보였고 부탄가스 흡입이 잦았다고 한다. 뇌막염 치료가 정신병 치료로 바뀌었다. 이후 정신병원을 전전했고 잠시 고향 집에 머물다 이곳에 입소했다.
“아주 어릴 때는 생각도 안 나요.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친구가 없었으니깐 생각이 안 나죠. 여기서는 불편한 것도 없고 재밌는 것도 없고.”
아버지는 경북 □□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했었는데,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뒤 그를 시설로 보냈다. 중풍이 있던 아버지는 그를 시설로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땅히 아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시설로 보낸 것이다. 홍씨가 그리워하는 건 그때 잠시 머물던 고향이었다.
“20년째 이곳에 처박아 둡니다.” “누나가 면회는 오는데 왜 나를 안 데려가는지 모르겠어요.” “고향은 경북 □□인데 떠난 지 36년이나 됐네요. 집에도 가고 싶고 외박도 하고 싶고 퇴원도 하고 싶어요.” 그는 시설 관계자와의 상담에서 매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상담자가 몇 번 바뀌어도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홍씨 애창곡은 TV에 나오는 걸 보고 배운 ‘경상도 청년’이다. 시설 안에 있는 노래방이 개방되면 그 노래만 줄곧 부른다.
원망
이남균(가명·55)씨는 21살부터 정신병원 2곳과 정신요양시설 2곳을 옮겨 다녔다. 병원과 시설을 전전하며 살아온 지 34년째다. 그러는 사이 50대 중반이 됐다.
가족의 발길은 10여년 전 끊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 거동이 불편해졌다. 형제들도 다 결혼해 자식을 키우느라 바빠 보였다. 그는 언젠가 “달력이 내 자신처럼 느껴져요”라고 상담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면회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존재여서 자신을 달력에 비유한 것 같았다. “1년에 두 번밖에 면회를 안 와요. 세월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라는 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면회를 기다리던 마음은 발길이 끊긴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때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일러바치듯 털어놨다. “작은 형이 시험 끝나면 온다고 해서 달력에 표시해가면서 기다렸는데, 소식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요.” “큰 형은 전화기를 분실했다고 해요. 외면하는 거지.” 무료한 그의 일상에서 유일하게 기다렸던 일은 가족의 면회뿐이었데, 이제는 “가족 중에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판박이 환자들
이들이 살고 있는 A정신요양시설 입소환자 225명 중 무연고자는 92명이다. 나머지 133명 중 가족들의 지지가 낮은 경우는 51명, 연락이 아예 두절된 사례는 4명이었다. 시설은 가족의 면회 회수와 평소 연락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가족 지지도를 분류하는데, 면회를 1년에 1~2회 오고 환자 문제로 연락을 취했을 때 응답하는 정도를 ‘지지도가 높음’ 상태로 보고 있다. 사실상 높음 수준 밑의 단계는 무연고 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65%(147명)가 사회와 단절된 채 시설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무연고 환자 숫자는 시간이 지나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족이 있는 환자들 중 부친이나 모친이 살아 있는 경우는 31명인데, 이들 환자의 평균 나이는 55.9세다. 부모가 80세 이상의 연로한 노인인 셈이다. 부모가 사망하면 자연스럽게 무연고자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미 무연고자가 된 92명의 평균 나이는 61.4세였다.
이 같은 상황은 A시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국민일보가 서울시의회 이정인 의원을 통해 서울시 민간 위탁 정신요양시설 3곳을 분석했더니 입소자 588명(2019년 11월 기준) 중 397명(67.5%)이 무연고자였다. 평균연령은 60세가 안 되는데 10년 이상 수용자는 403명(68.5%)이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미래한국당 김승희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전국 59개 정신요양시설 입소자 9252명 중 10년 이상 수용자는 4293명이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8705&code=11131100&cp=nv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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