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정신장애인을 관리하라고? 그래서 대안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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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은 여전히 전근대적
계몽주의적이고 신화에 기초한 정신장애 언론 기사 문법은 '사망 선고'
전주일보 신문 화면 갈무리.
가지가지한다는 생각이 든 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정신장애와 관련된 고답적인 클리셰(진부한) 기사가 또 생산됐다. 언론이 정신장애에 접근하는 시선은 어떻게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지난 28일 전북 지방지인 전주일보는 “전북서 정신질환 흉기 범죄 잇따라…시민 불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행했다. 신문은 리드(앞 문장)에 “최근 도내에서 정신질환 범죄가 잇따르고 있어 시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라고 적었다. 글쎄, 정신질환 범죄의 규모와 지속성이 어떠해야 ‘범죄가 잇따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실제 기자가 정신장애인에 의한 사건사고 사례를 든 건 2건뿐인데 말이다.
비슷한 사건이 과도하게 이어질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 ‘잇따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일 년에 두세 건 일어난 사건을 갖고 ‘잇따른’이라고 쓰지는 않는다. 만약 일 년 동안 한 지역에서 화물차 기사의 졸음운전으로 사고가 두 건 발생했을 때 거기에 대고 ‘잇따르고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히 지난 달, 혹은 몇월에 이런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보완해 언급할 수는 있겠다.
전주일보 조강연 기자는 두 건의 사건 중 먼저 이달 28일 사건을 언급했다. 교회에서 40대 남성이 50대 여성을 둔기로 때로 숨지게 했다는 사건이었다. 그의 기사에 따르면 “피의자는 조현병 등 정신과 치료 이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두 번째 사건을 들었다. 사건은 역시 이달 22일 발생했다. 30대의 피의자는 전주의 한 길거리에서 20대 여성을 흉기로 위협하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여성은 그곳을 벗어났다. 조 기자는 기사에 “경찰은 (피의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병원에 입원 조치했다”고 보도했다.
조 기자는 이어 “도내 정신질환 범죄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며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 강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다”라고 적었다.
확정편향의 오류라는 이론이 있다. 내가 보고 싶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겠다는 심리적 기제를 의미한다. 정신장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위험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늘 언론이 그들의 범죄를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 바깥의 어두운 정신병원에서 지내야 하는 존재들인데 세상에 나와 활개치고 있다. 시민들은 두려워한다. 그런 정신장애인이 사고를 쳤다. 그것도 모자라 사람을 살해했다. 국가는 왜 이들을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가.
확실히 조 기자가 현미경을 들이댄 곳은 정신장애인라는 소수자의 삶이다. 조 기자에게 정신장애인은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인간 유형들이며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표상되는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존재들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이 같은 강력범죄를 저질렀으니 이는 사회 안전을 해치는 일차적 위험 요소(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쓴다. 왜? 사회 안전을 위해.
이때 기자가 느끼는 불안감은 기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불안으로 확산된다. 이는 기자가 그렇게 유도하고 만들어내는 허구인데도 기자는 자신의 불안을 전이시켜 시민의 불안으로 확장시킨다.
요즘은 조금씩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욕구와 국가의 의무를 전하는 뉴스들을 이따금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정신장애를 취재하는 기자는 정신장애인의 사건사고에 대해 확정된 편향성 보도를 남발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존재론적 불안감을 증폭시킨 후에 기사 말미에 “정신장애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멘트를 넣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놓고 폭행은 안 된다는 궤변과 뭐가 다를까. 전주일보 조 기자는 역시나 말미에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 강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를 언급했다. 이는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요청과 관리 강화가 시급하다는 적극적 요청에서 범주만 다를 뿐 그 안에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동시에 작동하는 맥락을 갖고 있다.
조 기자가 제시한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 강화”는 조 기자 스스로가 가지는 존재론적 두려움이며 시민의 목소리를 가장한 스스로의 공포심을 정신질환이라는 질병에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 기자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관리의 강화’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관리는 분명히 ‘통제’라는 물리적 제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정신장애인에 대한 관리 강화는 누가, 어떤 형식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라는 것인지. 국가가? 국가가 이 위험한 정신장애인의 삶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라면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럼 그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정신장애인은 어떤 방식으로 관리돼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 폭력적 감금 외에는 없지 않은가. 정신장애인에 대한 관리는 부모가 아이에게 가지는 훈육적 통제와는 다르다. 부모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훈육하지만 정신장애인은 국가가 사랑이라는 이념에 기반해 훈육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장애인은 개별화돼서 호명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원과 같은 집단적 통제 공간에서 훈육되고 ‘사육’된다. 이 관리 요청은 정신장애인의 집단적 타자화와 맞물려 있는 고리다.
조 기자, 당신이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닐까. 어떻게 위험한 정신장애인이 공동체에서 시민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가, 그 문제를 이렇게 에둘러서 말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기사를 써야 하는데 마땅한 것은 없고 평소 위험스러운 존재로 인식됐던 정신장애인들이 2건의 사건을 일으킨 것을 두고 이를 취합하고 종합해서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정신장애인의 위험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 생각이 없이 기사화한 것일까.
조 기자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과 같은 클리셰하고 고답적인 취재 보도 문법은 이제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점을 말이다. 몇 개의 정신장애인 사건을 열거하고 관리 강화를 외치는 선동적이고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입은, 혹은 계몽은 이제 그 수명을 다 했다는 의미다. 따라서 법의학적 정신질환 감정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당신은 펜을 내려놓고 있어야 한다. 설사 법원 판결문에 정신질환이 언급되더라도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삶의 존엄을 훼손할 수 있다면 그 글쓰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조 기자와 같은 보도 문법은 “정말, 가지가지한다”는 자조와 경멸로 되돌아갈 것이다.
자유를 향한 정신장애인의 정치적 투쟁에 언론이 언제 눈길 한 번 준 적이 있는가.
의료권력과 진단명 아래에서 침묵했던 고전주의적 정신장애인의 정체성은 이제 정신장애인 당사자 스스로가 인간됨을 선언하고 그 선언의 법적·제도적 장치 구축을 위해 정치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이상 조 기자의 기사와 같은 통제적이고 관리적 결말을 이끌어내는 보도 태도를 정신장애인들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당신에게 보내는 요청이 아니라, 당신을 포함한 언론에 보내는 경고다.
거듭 말하지만 정신장애인은 더 이상 침묵하는 존재가 아니다. 정신병원의 폭압적 규율을 허물어뜨리고 정신요양시설의 일상적 폭력과 훈육에 문제를 제기하고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정치세력화된 정신장애인 단체들이 하나둘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빗나간 계몽주의 사유로 우리와 시민을 나누고 사회적 위험성을 증폭시키려는 당신들의 고민 없는 기사쓰기는 이제 멈추기 바란다. 그러기에 정신장애인은 그 긴 시간 너무 많은 차별과 폭력에 길들여져 왔다. 언론이 그 ‘앞잡이’가 되지 말기 바란다. 아니, 요청한다.
출처 : 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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