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정신질환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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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감정
랜돌프 M. 네스 지음, 안진이 옮김/더퀘스트(2020)
진화의학자 랜돌프 M. 네스의 <이기적 감정>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연상시킨다. “감정은 당신의 행복에 관심이 없다.” 좋든 나쁘든 우리의 감정은 우리 자신보다 유전자를 이롭게 하려고 진화했다. 자연선택은 불안과 우울, 슬픔, 수치심과 같은 나쁜 감정을 제거하지 않았다. 인간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더라도 나쁜 감정은 생존과 유전자의 복제를 위해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부정적 감정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인데 어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책 제목이 주는 인상과 달리 이 책의 무게중심은 유전자가 아니라 ‘정신의학’에 있다.
책의 저자, 랜돌프 M. 네스는 정신과 의사이며 ‘진화의학’이라는 학문을 처음으로 설계한 과학자이다. 진화론과 의학은 아주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의학은 진료활동 위주의 실용적 분야이다. 진화론적 설명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의학은 정신장애를 뇌질환으로 규정하고 약물치료에 집중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우울증과 정신장애는 점점 더 증가하고 항우울제 처방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 치료에 앞서 정신장애를 폭넓게 이해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진화론과 의학은 연결되었다.
진화의학은 의학이 던진 질문, ‘왜 어떤 이는 정신장애에 걸릴까?’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들었다. 왜 정신장애가 생겨난 것일까? 정신장애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을까? 왜 인간이란 종은 불안과 우울, 중독, 자폐장애, 조현병에 취약한 것일까? 이렇게 진화적 관점에서 나쁜 감정과 정신장애가 생기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 몸의 기분조절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기분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좋지 못한 상황은 불안과 우울과 같은 나쁜 감정을 불러내, 그 상황을 벗어나도록 유도한다. 불안과 우울은 열이나 기침, 통증처럼 특정한 상황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긍정적인 감정은 좋고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적절한 감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분조절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을 경우,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가 생긴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삶과 감정의 맥락이 다르다. 유전자와 성격과 같은 개인의 특성은 고정되어 있더라도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때문에 개개인의 기분장애를 이해하기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기분장애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며, 다양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증상이 발현되고, 심지어는 한 개인 안에서도 여러 원인이 복잡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로 다른 시점에 증상을 나타낸다.”
우리는 아직 정신질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진화의학은 정신장애의 출발점이 되는 삶의 환경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불안과 우울,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럴 때 “막연하게 정신장애가 유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보다는 질병, 고독, 피로, 실업, 빈곤을 비롯한 개개인의 경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가 남긴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려면 크나큰 지혜와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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