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의 기저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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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만큼 복잡한 단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 가족은 살아야 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삶을 짓누르고 최악의 경우 살려는 의지를 꺾어버리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병명은 가족>은 가족의 이런 ‘이중성’에 주목한다. 시골 마을의 정신과부터 치료감호소(국립법무병원)까지 다양한 곳에서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만나온 지은이는 책을 열며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가족은 둥지일까, 족쇄일까.”
책에는 ‘족쇄’로 기능하는 가족을 둔 환자의 사례가 줄지어 등장한다. 알코올 중독, 조현병, 거식증, 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 이 질환들은, 증상은 다르지만 ‘일그러진 가족’이란 토양에서 발현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철수(이하 모두 가명)는 어머니에게 라면 물을 붓고, 야구방망이로 복부를 가격해 치료감호소에 왔다. 두 번째였다. 철수는 수년 전 층간소음에 앙심을 품고 위층 집 자동차를 부숴 6년 동안 치료감호소에서 지냈다. 그러고선 퇴소 석달 만에 어머니를 폭행한 것이다. 철수의 상태를 감정하기 위해 상담을 하던 지은이는 수상한 낌새를 발견한다. 철수는 병동 내 ‘실장’까지 할 정도로 모범적이었는데도 죄(기물파손)에 비해 치료감호소에 지나치게 오래 있었다. 당시 철수를 오래 지켜본 수간호사의 말은 의심에 힘을 실었다. “정작 환자는 어머니 같았어요. (…) 정신감정을 신청한 사람도 어머니이고, (퇴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사를 계속 안 본 것도 그 어머니고요.”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의사에게 기도를 종용하거나, ‘치료가 다 됐는지는 하느님이 정하신다’며 치료에 지나치게 개입했다. 철수와 그의 형 영수를 상담한 지은이는 철수의 어머니가 초등학생인 자녀들에게 새벽기도, 성경공부는 물론 매일 등교 전 교회 주변 쓰레기 줍기까지 시킬 정도로 통제가 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현병을 만드는 어머니’ 이론을 떠올린다. 불안하고 과보호적이며 냉정한 어머니에게 양육되면 자식은 조현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이론인데, 대세 이론도 아니고 상당한 공격도 받았으나 지은이는 이 이론에 남아 있는 일말의 진실을 조심스레 꺼내 보인다. “불안정한 가족 형태의 양육은, 조현병에 취약한 소인을 가진 사람에게는 충분한 발병 원인이 될 수 있다.”
일간지 편집기자 출신인 지은이 류희주는 “불안과 우울은 실존하는 병이냐, 인간의 본성이냐”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지은이는 아내의 가출로 체중이 30㎏이나 빠질 정도로 심한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정’과, 명문대 출신 연구원으로 사회적 성공은 이뤘지만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에 신음하는 ‘지우 선배’에게서도 가족이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읽어낸다. “공황장애는 모든 종류의 상실과 관계있”기에 ‘정’이 겪은 죽음의 공포는 배우자의 상실에서 뻗어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아직도 가장 맛있는 반찬은 자기 앞으로 가져오는” 자기중심적 아버지와 “너를 낳지 않으려 했다”고 말하곤 했던 어머니, 서울대 출신 두 언니 틈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강박처럼 해왔던 자기검열이 ‘지우 선배’의 마음을 꽁꽁 옭아맸을 개연성도 지은이는 짚는다.
시중에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이 상당히 많지만 이 책은 ‘하우투’(how to)가 없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지은이는 섣불리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의 ‘항상성’이 무너진 여러 환자의 마음을 해부해 그 기저에 가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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