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인의 악몽이 사회적 지지를 만나면 비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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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과 편견을 증대시키는 언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책을 낸 당사자로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방송사 작가의 전화였다. 조현병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흔쾌히 출연하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18년 차 조현병 당사자다. 『바울의 가시(나는 조현병 환자다)』라는 책을 출판했고, 장애인식개선을 위해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취지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방송이 나간 뉴스 영상은 본래의 취지를 벗어났다. 자극적인 조현병 환청 체험, 조현병 범죄의 증가 그래프, 가족도 말리지 못하는 조현병 아들의 폭력 현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인터뷰 영상이 나갔다. 난 “조현병을 겪기 전에는 몰랐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는데, 방송 속 나의 모습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는 나약한 환자의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그리고 해당 보도의 유튜브 영상에는 다음과 같은 댓글들이 이어졌다.
“조현병 걸린 OO들은 사지를 묶어놓고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시켜라.”
“옛날엔 미치면 몽둥이로 때리지 않았나요?”
“조현병은 OO 정신분열증이다. 모조리 전자발찌 채우거나 입소시설에서 생활시켜라.”
“조현병O들은 가족차원에서 밥에 약 타서 죽이면 안될까?”
이처럼 언론의 보도는 정신장애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켰다. 정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정신장애인을 정신병원이나 외딴 섬에 가두면, 이 사회가 안전해질까? 불과 20년, 30년 전만 해도 그들의 바람대로 수많은 정신장애인들은 사회 밖으로 격리되어 폭력과 학대 속에 목숨을 잃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항수심원 사건이다.
장항수심원 사건
1997년 SBS 탐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취재진에 의해 장항수심원의 폐해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곳엔 100여 명이 넘는 정신장애인들이 강제 수용되었다. 이들은 쇠창살로 채워진 건물에서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통제되었다. ‘수감자’라는 글씨가 새겨진 앞치마를 입고 염전 노역을 하거나 섬 주민들의 농사와 잡역에 동원되었다. 부실한 식사에 생수 대신 바닷물로 갈증을 달랬으며, 빗물을 모아 목욕과 빨래를 했다. 이들은 섬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바닷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일부는 시설 관계자의 지시로 같은 원생들에게 매를 맞아 죽기도 했다. 그렇게 죽어 나간 원생들의 시신들은 산에 암매장되었다.
다행히 취재진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이 알려져 시설은 폐쇄되었으며, 원생들은 지역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16년, ‘그것이 알고 싶다’의 취재진은 원생들의 현황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상당수가 지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원생은 고향에 아는 사람이 없어 서울로 올라와 노숙생활을 하다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고, 다른 원생은 과거 폭력에 의한 악몽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다른 원생들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타지역 정신질환 수용시설에 보내지거나 교회 쉼터를 전전했다.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포기각서까지 쓰면서 돌아갈 곳이 없던 원생들의 대다수가 자살, 고독사, 병사, 행방불명된 것으로 취재 결과 밝혀졌다. 그들은 악몽 같은 섬을 빠져나온 뒤에도 왜 불행한 삶을 살아가야 했을까? 그들이 갖고 있는 장애로 인한 증상 외에도, 감당해야 할 수많은 고통과 외로움, 경제적 어려움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졌다면, 그들은 지역사회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정신장애인의 사회통합
지금도 이 사회에는 수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2016)에 의하면, 성인 4명중 1명은 평생에 한 번 정신질환을 경험한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1%는 조현병을 겪는다고 한다. 누군가는 병원과 요양원 시설에서 긴 세월을 보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지역사회 속에서 자신의 병을 감춘 채 혼자만의 공간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사회와 대중들이 정신장애인에게 혐오와 공포의 시선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낙인은 정신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적응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고 만다. 탈시설화의 흐름에 따라 정신장애인들이 병원과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돌아오더라도, 정신장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은 사회는 여전히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외딴 섬이고 따가운 시선과 태도에 시달리는 폭력적인 수용소일 뿐이다.
진정한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먼저 가족과 타인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지지는 정신장애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참여를 높이고, 지역사회에 대한 접근성을 증가시킨다. 정신장애인의 회복은 전문적 의료진의 치료와 약물 사용도 중요하지만, 병에 대처하며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과 반응을 통해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 사회가 정신장애인을 부정적으로 낙인한다면, 정신장애인 역시 스스로에게 부정적 자아 정체성을 확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가 지지해준다면 정신장애인도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집중하고, 건강상태를 유지하며 자신감과 함께 능력을 향상시켜 나갈 것이다.
나를 회복하게 만든 사회적지지
나 역시도 스무 살에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겪었던 아버지의 폭력, 학교에서의 왕따, 짧은 노숙자 생활은 불면증과 우울증을 가져왔다. 하지만 치료를 거부한 채 스파르타 기숙학원에서 재수생활을 했다. 결국 대학에 합격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지금까지 치료와 상담을 받고 있다. 장항수심원만큼의 고통스런 경험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과거의 외상 후 스트레스로 악몽에 시달렸다. 일주일에 2~3일은 과거의 망상에 시달리며 잠을 자지 못했다. 그나마 하루에 서너 시간 자는 동안에도 악몽에 시달리다 비명 속에 깨어나곤 했다. 대학교 생활도 온전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것도, 알바나 연애 같은 경험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지역사회와 같은 학교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외톨이 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선배를 따라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했다. 같이 대화할 사람, 같이 밥 먹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아리 선배들은 날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내 마음을 열 수 있었다. 함께 운동도 하고 주말에는 자취방에서 고기도 구워 먹었다. 또한 나의 아픈 과거를 말할 때, 동아리 사람들은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경청해 주었다. 함께 아파해 주고 위로를 받으며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렇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내 안에 긍정적인 정체성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당당하게 당사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과거에 겪었던 악몽 같은 시간들은 동아리라는 사회의 지지를 받아 비전이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책을 통해서, 강연을 통해서 내가 받은 지지를 함께 나눌 것이다. 같은 당사자로서 비슷한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언론과 일부 사람들은 우리에게 장항수심원과 같은 외딴 섬의 시설에서 격리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사회는 정신장애인에게 병을 숨기고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악몽 속에 시달리며 살아가도록 방치한다. 하지만 난 이 사회가 정신장애인들에게 격려와 위로 그리고 지지를 보내도록 변화시켜 나갈 것이다. 더 많은 당사자들이 집과 시설 밖으로 나오고, 함께 어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아가기를 원한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시달렸던 악몽도 사회적 지지를 받는다면, 미래를 향한 비전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삶을 통해 증명하고 싶다. 그렇게 정신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함께 어울러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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