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업무로 생긴 정신질환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지만 산재로 인정받기까지 직장인, 노동자의 싸움은 여전히 외롭고 험난하다. 산재 제도 자체의 문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신질환을 폭넓게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산재 인정을 어렵게 한다. 피해자들은 정신적 상처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다투기 전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게 맞느냐”는 질문부터 들어야 한다.
금융회사 직원 A씨는 1년 가까이 직장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A씨는 혼자 괴로워하다 병원을 찾았고 중증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회사는 그 기간 A씨를 해고했다. 산재로 인정받게 되면 A씨 해고는 무효가 되는 상황이었다. 이를 다투기 위해 A씨는 노동위원회 심문 과정에 참석했다. 그런데 함께 참석한 회사 측 관계자에게서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정신병 맞아요? 그거 다 병원 가서 아프다고 말하면 진단서 내주고 그런 거잖아요.” A씨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모자를 푹 눌러 쓸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이후 산재 승인을 받았고 해고는 무효가 됐다.
B씨는 공인회계사이자 회사의 임원급 고위직이었다. 누구도 임원이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롭게 취임한 회사 대표는 B씨에게 ‘직접 대출 받아 회사 자금을 조달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그는 재무를 총괄하는 보직에서도 밀려났다.
2017년 5월 출근길에 가슴통증과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정신질환 진단이 바로 내려지지 않았다. B씨는 상당 기간 상담과 검사를 받아야 했다. B씨는 급성스트레스 반응,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고 산재를 신청했다. 그의 산재 사건을 대리했던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대표는 “정신질환 산재는 일단 진단부터 난관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정신질환 상병 진단 자체가 쉽게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임상의마다 다르지만 장기간 진료를 해야만 진단명을 특정할 수 있다고 하거나 특수치료 등이 병행돼야 진단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러 의사를 찾아가도 진단이 다르게 나오는데 현장에서는 ‘정신질환이 산재가 된다’고 믿지 않는 의사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교수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그는 “(정신질환은) 영상 검사에서 눈에 띄는 소견이 나타나거나 혈액검사 결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진단명이 (의사마다) 다를 수 있다. 특히 과거에는 의사 소견서가 질판위에서 비중 있게 작용해 의사들이 진단서 발급에 부담을 느꼈다”고 말했다. 요즘은 산재 신청 당시 진단명이 판정위원들의 검토 후에 바뀌거나 ‘변경승인’을 거치는 경우도 있다.
정신질환이 업무상 질병인지 여부는 질판위가 판단한다. 질판위는 서울과 인천(경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6곳에 설치돼 있다. 정신질환 산재 심사는 2019년 8월 이전까지 서울에서만 이뤄졌다. 그만큼 신청 건수가 많지 않았다. 이후 신청 건이 늘어 지금은 전국 모든 질판위에서 정신질환을 다룬다. 다만 업무상 자살 산재 심사는 여전히 서울에서만 한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이르면 3월 중 자살 사건도 전국에서 심의할 수 있도록 내부 고시를 개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불안장애 안고 출근해야>
정신질환 산재 심사 과정은 정신질환을 얻은 직장인이 주치의 진단서와 직무 스트레스를 확인할 수 있는 의무기록을 함께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단이 먼저 내부적으로 사건을 검토한 뒤 질판위 안건으로 등록한다. 공단은 신청 서류의 임상심리검사 결과가 부적합하다고 판단하면 특별진찰을 할 수 있다.
질판위는 위원장을 포함해 7명 이내 위원으로 구성된다. 질환별로 위원 구성이 다른데 정신질환의 경우 임상의 2명과 직업환경의 2명이 필수적으로 참여한다. 나머지 2명은 변호사나 노무사 등을 위촉한다.
질판위는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과 심각도, 개인적 요인 등이 기술된 공단 관계자의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업무 관련성을 판정한다. 이때 신청인의 주장 내용이 사실인지 조사가 이뤄지는데 증상 발생 이전 6개월을 조사 대상으로 한다.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일의 부담 정도나 직업의 불안정성, 동료의 지지, 긴장이 높은 업무인지 여부, 괴롭힘, 폭언·성희롱 등)을 살피고 음주, 가족 사건, 금전 관계, 성격 경향 등 개인적 특성도 조사한다.
질판위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같은 정신질환 산재라도 질판위원의 성향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질판위가 다수결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질판위원은 “어떤 성향을 가진 전문가가 참여하느냐에 따라 좀 더 쉽게 승인이 되는 경우가 있고 팽팽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질판위 심사 전 공단 조사 단계에서 어떤 담당자를 만나느냐도 판정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재해조사 단계에서 담당자가 기초 조사, 주변인 증언 청취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산재 판정에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여부가 결정된다. 한 노무사는 “가해자에 대한 적극 조사가 어렵다보니 조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업무 관련성 조사를 담당하는) 지사 담당자를 잘 만나는 것도 운”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질판위 지침이 세부적으로 개정돼 위원 성향에 영향을 받는 부분이 다소 줄었다.
문제는 산재 신청부터 승인까지 기간이다. 보통 6개월이 걸리는데 그 기간 산재를 신청한 직장인, 노동자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계속 회사에 다니거나 징계 위험을 무릅쓰고 병가를 써야 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닐 경우 적응장애, 불안장애 등을 안고 산재 판정이 나올 때까지 버티기를 해야 한다.
회계사 B씨는 회사가 병가를 인정해주지 않아 산재 심사기간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대리하는 노무사에게 “내가 정신력 하나는 좋다. 계속 출근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B씨는 그 후 산재 인정을 받아 1년여간 치료받고 복직했다. 하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주변인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정신질환 산재 심사에서 중요한 것은 병이 업무로 생겼다고 입증하는 일이다. 이를 입증할 책임은 질환을 앓는 당사자에게 있다.
수도권의 한 대형마트 점포에서 조리 업무를 담당하던 C씨는 최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정신질환을 얻었다’며 사내 고충처리센터와 지방노동청에 신고했다. C씨 측은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직원들 앞에서 상사로부터 ‘너는 내 노예다’ 식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또 “실수할 때마다 상사가 벌을 세우고 사유서를 쓰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C씨 측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를 통해 취재팀에게 전달한 일기에는 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C씨의 심경이 담겨 있다. 그는 ‘새우튀김 5분을 튀겼으나 40마리는 검게 튀겨졌다. 40마리를 5만5200원을 주고 구입하고 사유서도 써냈다. 너무 힘들어서 배가 뒤틀리고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고 적었다. 직장갑질119는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공론화해 온 노동·인권 단체다.
해당 대형마트 사내 고충처리센터의 조사 결과는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지 않는다’였다. 회사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업무상 범위 내 행위로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수 없다. 어려운 사정임을 감안해 휴직제도를 안내하겠다”고 설명했다. 지방노동청도 ‘지각을 이유로 벌을 세웠다’ ‘무시 발언’ 등 진정 내용에 대해 각각 ‘확인되지 않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업무 실수에 대한 사유서 제출 강요’에 대해서는 ‘업무상 적정 범위 내의 지시’라고 봤다. 노동청의 결론은 ‘법 위반 사항이 없음이 확인돼 사건을 종결한다’는 것이었다.
C씨 측은 “직장상사의 폭언은 따로 녹음 파일을 남겨놓지 못해 증거로 제시하지 못했다. 증거가 부족한 상태이다보니 직장 동료들이 선뜻 가해자의 괴롭힘을 증언해주기 어렵고 스스로 모든 걸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업무상 스트레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는 입증이 더 어렵다. 피해 내용을 증거로 수집하지 않은 경우 당사자가 사망하면 책임 입증은 주변 동료들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료들이 사망한 사람을 대신해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D씨(사망)의 산재 승인 과정을 보면 동료의 증언을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D씨는 2012년 대기업 연구직으로 입사했지만 3년 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현장 업무를 맡게 됐다. 그 사이 회사의 구조조정이 시작됐고 D씨가 속한 부서는 그를 상대로 희망퇴직 면담을 실시했다. 또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주고 괴롭혔다. 힘들어하던 D씨는 토요일 오전 3시쯤 집을 나간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가족들은 태어난 지 두 달 된 자녀를 두고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한 D씨가 왜 비극적 선택을 했는지 밝히고 싶었다. 그의 일기장에 회사 내 스트레스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어떤 영상이나 녹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 옛 동료라고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걸어 증언하겠다고 했다. 그 동료는 “내가 회사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다면 절대 (증언을) 못 해줬을 텐데 퇴직해서 도와줄 수 있다. 회사에서 압박이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내 삶에 떳떳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은 질판위에 증거 자료로 제출됐다.
회사는 증언한 옛 동료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다. 명예훼손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데도 회사는 압박용으로 그를 괴롭혔다. D씨의 처제 배모씨는 “법적으로 죄가 성립되지 않았지만 그 동료 분은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 인터뷰 요청을 부탁드렸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못 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산재재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동희 일과사람 공인노무사는 “현재 정신질환 산재 제도는 본인이 아픈 것과 왜 정신질환에 걸렸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라는 것”이라며 “만약 회사 모든 동료가 입을 막는다고 하면 어떤 노무사가 붙어도 산재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산재 심사 과정에서 회사 측이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조사를 하면 산재 신청 노동자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권 노무사는 “정신질환 산재를 신청했다가 (회사의 소극적 태도 탓에) 회사에서 두 번 버려졌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대형마트에서 조리 업무를 한 C씨는 현재 산재 신청을 망설이고 있다. 노동청이 별다른 혐의가 없다며 사건을 종결했으므로 산재 승인이 어려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C씨 측은 “가해자의 사과를 받는 게 어렵다면 산재라도 인정받고 싶었다”면서 “더 이상 일을 다니기 어려워 치료비도 부담스러운데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 질판위의 산재 판정은 독립적으로 이뤄지지만 노동청이나 형사기관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노무법인 시선의 김 대표는 “노동청의 조사 결과나 형사기관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 산재 판정이 그대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질환 산재는 괴롭힘 형태가 교묘할 수 있어 입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차분히 증거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spring@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