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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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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가 바라본 정신과적 질병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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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헤타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23,209회   작성일Date 19-03-0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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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가 바라본 정신과적 질병모델.


     사람은 아주 오래 전 언어를 습득했고, 그 언어를 기반으로 조직을, 사회를 구축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암묵적인 약속을 가진 ‘소리’와 ‘문자’로서 객관적인 정보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서로 다를 무수한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주된 이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죠. 아주 간단한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과학, 학문이라는 것은 그 언어에서 또 주관적인 부분을 배제하여 객관적인 사실들만을 택하여 축적해왔습니다. 개인의 진실은 모두가 이해하기 어렵고, 서로가 같은 이해를 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리학에, 그리고 쌓여온 지식에 기대어 과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획일적이고 공통적으로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

     그것이 현대의 첨단 문물을 만들어왔고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 거대한 ‘집단 지식’의 혜택을 직,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봉건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넘어온 것도, 농업시대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지금의 시대로 넘어온 것도, 모두 그 ‘집단 지식’, ‘학문’에 의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주관적인 진실은 무시 받아야 하고 사라져야 하는 오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학이라는 입증주의의 세계에서도 시대의 한계는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례로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에는 그것은 그에게 국한된 ‘주관적 진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과학이라고 인정받지 않았죠.

     물론 그는 객관적이라 말할 수 있는 관측과 계산을 한 경우이기는 했지만, 시대의 상식에 너무 어긋나면, 아무리 그가 옳은 소리를 할지라도 몽상가가 돼 버리기 쉽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어떨까요? 그들의 ‘주관적인 진실’은 ‘객관적 진실’이 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사회는 그렇다고 대답을 돌려줍니다. 질환자들의 말은 신뢰할 수 없는 것.

     그들에게 우리는 그저 ‘미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것들 중 하나가 지금부터 이야기 할 정신과적 질병모델입니다.

     의학에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체의 모형이 존재합니다. 그 범주를 벗어나면 질병에 걸렸고 치유해야 할 것으로 보는 데,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진행해 회복하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질병 모델이라고 칭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울증, 조현증, 아스퍼거증후군등의 질환의 분류를 하기위한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기간과 감정의 상태, 행동의 이상 등의 임상적 데이터(환자를 진료하거나 의학의 발전을 위해 연구하기 위해 병상에 임할 때 발생한 결과물들)를 기초로 하여 질병을 분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DSM진단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를 기점으로 질병을 분류하게 됩니다.

     학자들은 이를 생물학적인 범주와 사회학적 범주로 구분 지었고, 지금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생물학적 정신건강 질병모델이 정신질환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입니다.
     
     저는 이 질병모델이 변화해야하고 심지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쌓여온 지식, 관찰, 생물학적인 증거 등은 무시할 수 없는 분명한 진실이고, 이는 우리에게 필요로 하고 또한 발전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코 그들은 사이비나 사기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의학파트에 비해 진단이 정확하고 치료가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낮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례로 조현증이나 조울증은 완치를 목표로 치료를 진행하지 않고 일상에 지장이 오지 않을 만큼 조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현시점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APA(미국 심리학회)의 영향력있는 DSM(정신장애 통계 매뉴얼)에 대한 신뢰도 통계치가 시간이 흐르며 안정적으로 떨어졌다는 점 또한 주목해 볼 만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예로 보면 알 수 있듯, 정신과의 한계가 뚜렷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우린 온전하게 이해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의학, 병리학적인 접근은, 우리의 정신을 이해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질병모델과 치료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파트의 의학도 현시점에서는 완벽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 있다는 점에서 정신과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신과의 축적된 지식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불확실할지언정, 비전문가들보다는 안전하고 확실한 치유법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저를 포함한 당사자들이 아무리 싫다고 욕을 하더라도 급하면 찾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병원이고 의사인 것도 그 이유입니다.

     당사자들은 공포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죠. 우리 질환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들이 아무도 없기에 당사자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돼 버립니다.

     어떤 이는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야기하는 현시점의 정신과가 혐오의 낙인을 거두어 줄 것이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질환과 같이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다른 질환을 앓는 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아 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태어날 때부터 갖는 근본적이고 상속적인 문제로 보아 더욱 멀리하는 결과로 나타나 지게 되었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피는 저주받았어! 그들은 우리와 태어날 때부터 달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외치는 모습과 같다고 할까요?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만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질환을 핑계 삼아 ‘헛소리’로 일축해버리고는 합니다. 물론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에게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발언의 무게는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망상에 빠졌고, 이성적이지 않아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다.

     정말로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조현을 앓는 환자들과 심각한 조울 장애환자들이 그러할 까요?

     이것은 확언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불안정한 질병모델에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이 사회에서 정신과적 질병모델은, 끔찍한 낙인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정신과 전문의들만큼 정신과적 지식을 쌓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들과 지식적인 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문가라는 권위’의 힘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질환에 걸리지 않은 이들에게는 당사자 본인보다 의사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 있게 들리게 마련이고, 많은 당사자들이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서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당사자들은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이 폐쇄병동이 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면, ‘당사자’인데도 외면받습니다. 쉽사리 수면 위에 떠 오르지도 않고, 관심도 가져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라져가야 할 폐쇄병동이 아직도 버젓이, 그 많은 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그 불안정한 질병모델, 그들의 축적된 지식입니다. 그를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의 요구와 다르게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세계적인 흐름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이 나라를 말이죠.

     그리고 의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언론을 통해 질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문의’ 타이틀을 걸고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질환자의 주관적인 진실들은 그들의 ‘의학’에 헛소리로 치부되어 버립니다. 자의로 입 퇴원 할 수 없는 폐쇄병동이 그를 증명하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폐쇄 병동은 병식이 없으며 치료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환자들을 입원시키기 위한 병동으로 모든 것이 바깥과 차단된 곳입니다.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 그 안의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워 학대가 벌어져도 바깥에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관련된 비리와 폭력에 관한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폐쇄병동은 개정 법령에 따라 두명의 의사와 국가소속의 한명의 의사가 판단해 입원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당사자의 의견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위험하고, 우리 질환자들은 제대로 된 대화가 통화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창 개정하려고 하는 고 임세원 법은 이보다 더 간단히 입원이 가능하게 조정되고 있습니다.

     가끔은 자기스스로의 의지로 폐쇄병동에 입원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소수의 경우를 예시로 들기 에는 강제로 폐쇄병동에 ‘끌려가는’경우가 훨씬 많이 있음을 주지해야 할 사실입니다.

     거기에 퇴원 또한 자신의 의지가 아닌, 환자의 가족과 의사의 판단으로 이루어집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위험하지도 않고 이성이 완벽히 무너져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 번이고 이야기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사회는 정신 질환 당사자들에게 부정적입니다. 너무도 가혹하게 말이죠.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의사들에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쇄신의 의무가 의사에게는 없겠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의무겠죠. 하지만, 그들의 말이 혐오를 불러일으킨다면 문제가 됩니다.

     또한 자기변호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질병모델’은 폐기되거나 조금 더 유연해 져야만 합니다.
     이성이 무너진다는 조현당사자도, 조현적 증상을 공유하는 1형 조울증 당사자도 평범하게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치료가 되었다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제대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무시 받는 것은 비단 강제 입원만이 아닙니다. 지나친 약물 중심의 치료형태에도 있습니다. 약물의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부작용’은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옵니다.

     환자가 아닌 보호자들은 약을 잘 먹지 않으려하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약을 먹이려고만 듭니다.

     약, 효과적인 부분이 분명이 존재합니다. 양성적 조현증상에 특히 잘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본 당사자들은, 그리고 당사자 운동가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언제나 약에 대한 부작용이 심하다고 단언합니다.

     저 또한 정신이 자주 멍해지거나 속이 좋지 않거나, 어지럽거나 여러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장기간 복용한 이들은 언어가 어눌해지고 신체적으로 문제가 생긴 경우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사의 대답은 같습니다.

     ‘약은 부작용이 없다.’

     효과적인 약이라면, 안정을 가져다줍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작용이 분명 심한데도 없다고 이야기하며 과잉처방이 되버리면, 부족한 처방보다도 못한 결과를 도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 외의 치료법을 찾아야합니다. 당사자들의 약물 부작용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최소화하기 위해 의사들은 나서야만 합니다.

     과거에는 약물이외의 치료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러했던 방향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의사들은 어느 순간 약물 중심주의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그 초기 정신과의 정신이 돌아오길 바랍니다.

     하지만 현재의 약 중심 치료의 문제는, 단순히 의사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건 보험 수가의 문제로도 이어지는 제도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면담을 진행하거나 다른 치료방안을 제시하는 것보다 약물을 처방하는 것이 더 높게 책정되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선방안을 당사자와, 의사와 함께 논의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은 개선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숭고한 직업임에 분명하지만, 그들도 정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하는 ‘근로자’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의사들의 정당한 수익을 보존하면서 약물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본인으로서 말하자면 사실 ‘치료’는 달가운 단어가 아닙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정신과적 질병모델을 옹호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그들의 질병모델에 따라 우리가 내는 목소리는 ‘신뢰 없는 것’으로 매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 다르고, 그 다름에 의해 조금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치유하기 위해 질병모델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당사자들이 보통의 사람들로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정신과적 질병모델은 그런 식으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병원을 늘릴 것이 아니라, 그 질병모델을 이용해 급성기(질환이 급격히 악화되는 시기)의 환자가 잠시 머물 ‘쉼터’를 만들고 늘려야 할 것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현장에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급성기의 당사자가 감옥 같은 곳에 처박혀 사회에서 격리된 체 죄수처럼 살아가는 데 사용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폐쇄병동을 옹호하는 곳에서 사용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지우는 데 사용돼서는 안 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기 위해 ‘질병모델’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이 우리 질환자들이 ‘이웃’이며 ‘적이 아닌 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어떻게 대처하고 대해야 하는 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지우지 말고, 우리를 저 세상 밖으로 던져 넣지 마세요.

     우리는 언제나, 당신들 곁에, 당신들 옆에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들의 세계에 있는 이웃입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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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민님의 댓글

    조성민 작성일 Date

    고민이 가득한 글 반갑습니다. 그런데, 본문 중에 약간의 오류가 있네요. 심리학은 질병모델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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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타님의 댓글의 댓글

    헤타 작성일 Date

    그런생각으로 작성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지적하신대로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네요. 심리학이란 단어를 빼려했는데, 수정이 안된다고 합니다. 댓글이 작성된 글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