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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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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레노어는 엘레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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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헤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9,345회   작성일Date 19-02-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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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글은 2017년 作, 실화 바탕의 영화(미국) 55 Steps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이해가 어려울 수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본 영화를 보실 분이라면 글을 읽지 않으시길 권해드립니다.


     엘레노어는 엘레노어다.


     2018년 12월 31일. 정신장애 당사자들과 대한민국을 충격으로 몰아넣는 살인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당사자는 강북 삼성병원에 재직 중이던 임세원 교수와 그가 담당하던 조울증 환자 박○민.
     
     그 사건은 하나의 법안을 발안하기에 이릅니다. 고 임세원 법이라 칭해진 그 법은 의사의 안전을 강화하며 한편으로는 비자의 입원을 사법 입원으로 전환하여 의사와 가족들에게 떠넘겨진 짐을 정부가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까놓고 보면, 취지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개정안은 강제입원을 손쉽게, 그리고 길게 할 수 있게 한다는 법안이라고 축약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편견과 차별 없이 정신질환이 치료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이 사건은 조울증 앓고 있는 ‘사람’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 자체가 이미 공고한 편견에 편승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작 질환이 범죄와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쏙 빠져있습니다.

     사실상 살인사건과 조울증의 관계는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여러 논문과 관련 자료들에서 양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범죄와 정신질환과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대부분의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현실이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사람을 살해한 것이지, 질환이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닙니다. 질환과 범죄는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법안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발안하는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 주장 어디에 편견과 차별 없는 치료가 있다는 것인지 참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이 최근 감명 깊게 본 55 Steps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의 의사들과 언론들의 행태가 영화상의 엘레노어와 콜렛트가 넘어서려던 벽과 비슷해 보였으니까요. 영화는 리즈 결정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들의 시작은 1985년, 샌프란시스코의 세인트메리 정신병원에서 출발합니다.


     영화, 55 Steps는 실화다!


     어두운 화면에서 엘렌노어 리즈(헬레나 본햄 카터분)의 절규가 울려 퍼지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약을) 너무 많이 주고 있어! (격리실)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엘레노어는 분명하게 약과 격리실이 어떠한 것인지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녀를 구속한 간호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사지를 결박한 체 그녀의 팬티를 내려 약을 주입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영화상에 펼쳐집니다.

     엘레노어는 곧바로 경련을 일으키며 정신을 잃었고, 한밤 중 깨어납니다. 멍한 정신으로 그녀는 도움을 구합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도와달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듣지않고, 그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수치와 고통 속에 그녀는 매트에 소변을 보고야 맙니다.

     날이 밝자 잔뜩 화가 난 엘레노어는 청소보다 먼저 전화를 걸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녀는 환자권리센터에 전화를 걸어 변호사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병원의 의사는 흘 깃 리즈를 바라보는 데, 그 시선은 ‘사람’이 아닌 ‘물건’을 보는 것만 같이 기계적입니다.

     결국 엘레노어의 전화를 받은 변호사 콜렛트 휴즈(힐러리 스웽크분)가 찾아오고, 본격적인 재판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콜렛트가 엘레노어를 돕는 관계로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정상인이자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콜렛트는 시종일관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며 강박에 시달리듯 실수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합니다.
     
     그에 반해 엘레노어는 시종일관 여유가 있고, 재판에 대한 열정이 있으며, 긴 시간 복용한 약에 대해 기록한 노트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복용한 시간, 용량,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적었고,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그 지식은 콜렛트가 찾기위해 노력한 것들이었지만, 간호사였던 콜렛트가 보기에도 놀라운 기록들이었습니다.

     콜렛트 또한 병원 측 변호사가 그녀를 법정에 세워 정신과 약물의 결정을 내리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걱정했지만, 그 노트로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엘레노어는 말합니다.

     ‘그래, 내가 틀렸다고 말해줘. 그냥 내가 옳지 않다고 말해줘.’
     
     언제나 그랬듯.

     그러나 콜렛트는 늘 그녀가 옳다고 말합니다. 엘레노어는 엘레노어이기 때문에.

     엘레노어는 언제나 솔직하고 고통 속에서도 남을 생각하고 도와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약물의 부작용으로 걷기조차 힘든 그녀가 법원의 55계단을 오르는 순간, 미국의 정신의학 개혁이 시작됩니다.

     네, 그 55계단이 바로 영화의 제목입니다.

     첫 공판에서 병원의 변호사들은 편견 그 자체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그에 반박하려는 모튼의 의견은 재판관이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법원은 엘레노어의 말에 관심조차 없었던 겁니다.


     엘레노어가 병원 측 변호사에게 말하다.


     ‘당신은 끔찍한 일을 한거야. 범정에와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어! 판사에게 물어봐줘요. 의사들이 환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사하는 건 괜찮은지!’

     분노와 슬픔을 담았지만, 법원의 누구도 그녀의 편은 없습니다. 기계적인 시선 외에는 아무것도.

     마치 지금의 한국에서 정신장애 당사자를 바라보듯.

     방관하거나, 편견에 휩쌓여있거나, 그들을 이용해서 정신장애 당사자를 격리하려하거나. 그 어디에도 당사자의 편은 없습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법원의 화장실에서의 참혹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 그녀는 카테터(Catheter- 체내에 삽입하여 소변등을 뽑아내는 도관)를 사용하여 소변을 봅니다. 그것 없이는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건 병원의 약에 의한 부작용이었습니다.


     2019의 한국과 꼭 닮은 80년대의 미국의 언론.


     영화에는 현 한국 언론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라디오 방송도 나옵니다. 콜렛트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병원이 엘레노어에게 행한일을 화학적 강간이라고 단언한 직후 진행자가 말합니다.

     ‘그럼, 더 많은 정신 질환자가 퇴원되어야 하나요? 길거리에 너무 많은 정신질환자가 있지는 않나요?’

     2018년 개정법안이 시행되었을 때, 언론과 국민들은 길거리에 수많은 정신질환자가 나오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들이 퇴원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런일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콜렛트는 더 많은 환자가 병원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했고 동시에 환자에게 의료적 선택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진행자는 말했습니다.

     ‘그건 모순이 아닙니까?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죠?’

     분명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기능손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질환이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질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에선 높은 기능을 보여주죠.

     엘레노어처럼. 그녀는 약물치료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과도하게 많은 약물치료를 거부했습니다.

     과도한 약물의 부작용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영화는 계속해서 디테일한 약물 부작용과 환자의 치료를 선택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콜렛트와 엘레노어의 관계에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신장애 당사자와 변호사의 관계이지만, 친구가 되어갑니다.


     모두의 의견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콜렛트의 아버지는 아메리칸 인디언이었습니다.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는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지 않았고, 그것은 콜렛트의 안에도 남아있었습니다.

     논쟁하려 하지 않고 누구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시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의견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

     이는 동료인 모튼에게 한 말이지만, 콜렛트와 엘레노어의 관계에서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영화내내 서로의 의견을 동등하게 여기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마지막 재판을 기다리며 쉬지 않고 달려온 콜렛트에게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라고 말하는 장면은 완벽하게 콜렛트와 엘레노어의 관계를 역전시킵니다.

     콜렛트는 두려웠습니다. 사람을 실망하게 하는 것이 두려웠고, 자신이 실수 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계속 일을 하고 공부했습니다. 그걸 솔직하게 말하게 만든 건 엘레노어였고, 그걸 부순게 도와준 것도 엘레노어였습니다.

     마치 상담사처럼.
     
     아니, 그저 평범한 사람같았습니다. 그저 조금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엘레노어는 엘레노어이고, 콜렛트는 콜렛트일뿐.

     
     그장면에서 그들은 정신질환당사자와 변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었습니다.

     법원의 계단을 오를때도 그랬습니다. 걷기 힘든 엘레노어와 함께하는 콜렛트의 모습에서 정신장애 당사자가 충분히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할수 있다는 모습을 비추어주었습니다. 조그마한 배려만 있다면 충분히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강제입원이 주 논쟁거리가 되고, 병원에서 나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55 Steps는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나오는 것도, 함께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저 조금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우리 정신장애 당사자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공고한 편견의 벽은 단단하지만, 그리고 그를 이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엘레노어 리즈와 콜렛트 휴즈가 그러했듯, 정신건강의학계의 개혁을 이루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당사자에게 치료를 거부할 권리와 치료의 위험성을 알 권리를 주어야 합니다.

     병원에서 나올 수 있도록,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고쳐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쉰다섯 걸음의 시작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강제입원을 강화시키려는 병원협회와, 국회의원들은 그 시도를 중지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고 임세원 법에 반대함을 밝히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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