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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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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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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들가을달
    댓글 댓글 1건   조회Hit 793회   작성일Date 23-12-19 13:51

    본문

    세상에 살아가면서 변하는 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

    변하고 싶지 않은 입장에선 삶이란 무궁무진한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불안 속에 삶이 아닐지 싶다.

    자잘한 일상은 조금의 예측은 가능하다. 하루를 짠 계획이 그렇다.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서점에 다녀오거나 병원에 다녀온다든지, 저녁 메뉴 같은 그런 정해진 레퍼토리가 그렇다

    물론 이런 간단한 계획조차도 변수로 다가올 때도 있다.

    융통성 있게 넘어갈 수 있지만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이니 패닉이 오기도 한다.

     

    내 삶도 그렇다. 일자리사업팀에 들어가서 파견을 나온 지 3개월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도 파견지에서 주어진 업무를 다 끝내고선 잠시 숨 좀 돌리려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흡연이 가능한 곳에 가서 멍 때리며 다음 업무에 대해 생각 중이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업무 전화인가, 하고 핸드폰을 확인하였을 때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스팸 전화인가? 하는 마음으로 무시할지 싶었지만, 그날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아서 받았다.

     

    □□□님 자녀 되시는 분 맞으신가요?

     

    , 맞아요. ”

     

    여기 □□경찰서입니다. ”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내가 들은 정보가 진짜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정신이 몽롱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발견된 시점에선 숨을 쉬지 않았고, 법의학자를 불러서 검시를 진행해야 한다는 거와 어머니가 살던 곳으로 오라는 거만 기억에 남았다

    나는 앵무새처럼 네네 똑같은 대답만 하였고, 통화를 끊었다. 얼마 안 가 이 전화가 꿈이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듯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져서 억지로 숨을 들이마시고 뱉어낸다


    차분히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머릿속은 과부하다.

    겨우 적응하고 있던 일상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진정해. 예상했던 일이잖아.’

     

    분명 그때 당시에 그렇게 되뇌었던 말이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왜 예상했냐고? 그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단짝 친구처럼 존재하던 술 때문이었다.

    그 단짝은 26년 가까이 나와 같은 나이가 될 정도로 꾸준히, 어쩔 땐 과하게 친하게 지냈다.

    어찌 보면 예상했던 일은 이 부분에서 당연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병, 많으면 일도 나가지 않고 다섯 병은 거뜬히 마시고 병원에 실려 가는 게 일상이라면 아주 지겹고 역겨운 일상이었다

    그 술 때문에 알코올 때문에 멀쩡하던 사람을 망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응급실에 가서 입원할 때마다 어머니는 술을 줄인다고 말했지만, 그게 쉽게 됐을까?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게 있다. 중독이 그렇다.

    그래, 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알코올 의존증(alcoholism)이었다.

    유흥이 필요하다며 심심하다고 마셨던 술은 이제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라고

    내게 입버릇처럼 말하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신과에 가보는 게 어떠냐는 권유도 해보고 술과 멀어질 수 있도록 취미생활을 만들어 보자는 식으로도 말하였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어머니는 고지식했으며 정신과에 강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자신의 중독이 중독이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랬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시도 하였고, 감정호소까지 하였다.

    화도 내고 울면서 빌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술을 줄이겠다는 빈말만이 돌아왔고 지켜지지 않았다. 끝내는 체념하고 그 모습을 방치하였다.

     

    그래, 한 병 정도는 괜찮겠지. ‘

     

    어느 순간 이런 안일하고 무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땐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원망과 분노는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고, 슬픔, 괴로움만이 흔적처럼 남아버렸다.

    그때의 어머니는 힘들었던 거 같다. 결혼생활은 평탄하지 않았고, 내가 걸음마를 뗄 때쯤 이혼하였다

    결혼생활 시절에 술 때문에 빚을 졌기에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던 어머니는 어린 나와 남동생을 아버지에게 양육권을 넘기고 자신이 태어났던 곳도 버린 채 홀로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떨어졌다. 어린 우리를 먹여 살려야 하기에 아버지는 나에게 동생을 맡기기도 했고, 외부에 맡기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론 고모에게 우리를 맡겼다.

    웃기게도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키워졌다는 이유만으로 고모에겐 눈엣가시로 느껴졌는지 동생과의 작은 차별과 핍박을 받으면서 커갔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린 나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엄마를 찾았다.

    그때의 나는 고작 5살밖에 되지 않았으며 세상 분별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지금 와서야 생각해 봤지만, 만일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 쪽에서 살았다고 해도 괴로움은 비슷했을 거 같다는 것이다

    어쩌면 더 비참할 수도 있다는 게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는 결론이었다.

    본론으로 다시 들어가자면 그런 상황이었다 보니 어머니는 날 그곳에 두는 것보다 데려가는 걸 선택했다.

    그 시절 우리의 삶은 한없이 냉정했고, 외로웠다고 서술하고 싶다.

    어머니는 마땅한 직장도 없이 일용직으로 파출부에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셨다.

     

    그런 환경에서 경제적으로 좋지 않았기에 우리는 제대로 된 집에서 살지 못했었다.

    그때의 어린 시절 내 기억이란 단편적이었지만, 그게 돈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보증금이 없는 대신 비교적 월세가 낮은 고시원에 겨우 들어가 둘이 눕기도 비좁은 공간에서 잠을 청했다.

    눈치를 보면서 공용 주방에서 빈약하게 먹고, 공용 화장실에서 씻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초등학교 생활을 그렇게 보냈었다.

     

    마냥 나쁜 기억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교 후 고시원에 들어가 혼자 어머니를 기다렸던 기억이라든지

    그런 기다림 속에서 내 학교 가방을 연필로 따라 그렸다든지, 어머니의 퇴근 시간에 맞춰 창밖을 내다본다든지.

    흐릿한 기억 속, 어쩌면 감정조차 흐려져서 미화된 부분도 없지 않았을 테지만 그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진 않지만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부분이었다. 밤이 되면 어머니는 술을 마시고, 고시원 방안에서 무분별한 상스러운 폭언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취한 어머니의 기분을 살짝이라도 거슬리면 그 분노의 화살은 나에게 향했다.

     

    언제는 그랬다. 퇴근하여 술을 걸치고 있던 어머니에게 나는 배가 고프다며 집 앞에 있는 호프집에 있는 치킨을 먹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돈이 그렇게 없어서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의 어머니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선 안 된다고 하였지만, 별수 없었나 보다 그럼에도 내게 치킨을 사주셨다.

     

    하지만 막상 많이 먹지 못하고 못 먹겠다고 했더니 술에 취한 어머니는 내 귀싸대기를 있는 힘껏 내려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 이후의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머니의 말로는 내 볼이 시퍼렇게 멍들었다고 했다.

    훗날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날, 어머니는 추억이라도 회상하는 듯이

    그때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했나 라고, 말하고선 그게 웃겼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맞았던 기억보다는 폭력을 행하고선 기쁘게 웃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겐 상처로 남았던 일이 되었다.

     

    그 말 한마디가 내 안에서 무언가가 어긋나게 된 시초이자 발병 전조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고시원에서 벗어나고, 반지하 원룸으로 가고, 1층 원룸으로 가고.

    차츰 조금씩 좋아지긴 했지만. 그놈의 거지 같은 가난과 술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돈 문제는 말해봤자 뭐하나?

    여기저기서 빌리고, 갚고 돌려막고 대부까지 손을 대어서 개인회생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친척들은 그것을 해결해 주려고 저 먼 광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왔지만, 어머니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입만 열면 거짓말을 뱉어내고선 

    상황에 안주하거나 도망만 쳤기에 진절머리를 치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포기하였다.

     

    그랬기에 26, 어쩌면 내가 알던 세월보다 훨씬 더 길게 어머니 곁을 지키던 이라는 친구는 그런 팍팍한 삶에 유일한 탈출구였으며 위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술이 관계를 망치고, 건강을 망치고, 모든 일에 원흉이 된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와 체구가 맞먹을 때야 물리적인 폭력도 사라졌다.

    대신 폭언은 더욱더 교묘해지고 상스러워졌으며, 나를 향한 비난은 나날이 발전하였다.

    분명 나를 사랑한 건 거짓이 아님에도 상처받았던 날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여전히 모르겠다. 복잡한 감정이 강한 색채를 띤다.


    슬픔, 분노, 혼란스러움, 괴로움.

     

    인생은 굴곡졌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위로 올라가는 건 더럽게 어려우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애초부터 내 인생은 정상에 올라가 봤던 시기가 있던가?

    조금만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면 바닥에 처박히고,

    겨우 추슬러서 일어나 올라가지만 또 땅에 처박히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바닥만 치는 삶을 살아가야 하냐고 지금도 묻는다.

     

    사는 게 너무 비참하다.

    중학생 때의 나는 그런 생각으로만 살아왔다.

    비관적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로.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큰 변화는 없었다.

    술을 마시는 빈도수는 더 늘어났으며, 나중엔 쓰러져서 응급실에 간 것도 셀 수 없었다.

    갈 때마다 다른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결론적으론 술이 문제였다.

    알코올 의존증이던 어머니는 그러나 다른 중독자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제대로 밥은 챙겨 먹지 않고 빈속에 술만 퍼붓는 게 아닌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도와줄 수도 없었다.

    친척들마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어린 내가 모든 걸 혼자 견뎌내야 했다.

     

    병원 간호도, 어머니의 빚도, 내 인생조차도.

     

    그놈의 술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숨이 막혀온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고나선 내가 없어지면 미친 듯이 찾았다.

    한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로 내 숨통을 막아버린다.

    하고 싶은 게 없었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다 필요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지옥 같은 생활을 끝맺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현실의 탈출구가 필요했고, 분리가 시급했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릴 거 같았다. 아니면 어머니를 죽이던가.

    그때의 나는 급성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시야는 좁아지고 생각은 고립되어 간다.

     

    그런 상황에서 난 기관에 여러 도움을 받아 어머니를 병동에 입원시키는 건 불가능했지만, 나와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1, 그렇게 자립 생활 주택에 들어오고 일방적으로 어머니의 연락을 무시하고 내가 돈을 벌 때쯤 내 질병의 발병을 촉진했던, 시초라고 정의할 수 있던 이가 죽었다.

    막상 그렇게 증오했던 이가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후련하지 않았다.

     

    상실은 이다지도 허무하고 아팠다. 예상한 상실이었음에도.

     

    어찌 보면 강제로 독립하게 된 나는 시간에 쫓기듯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벌어 먹고살기 위해선 무슨 행동부터 해야 할까?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난 파도손 뉴딜일자리 일자리 사업에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였다.

    그 후 교육을 받고 파견에 나가서 첫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출근 시간조차 못 맞추던 시절은 지나 이젠 몸이 아파도 출근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몇 개월 되지 않은 직장과 막 벌기 시작하여 모아둔 돈 없던 내게 어머니의 부고는 머리 아픈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매정하다고 이야기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장례식부터 납골당까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가족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남은 건 내가 모조리 해결해야 한다는 뜻도 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해야하는 나에게 서러움이 복받쳐 왔다.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남은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일단 친척에게 연락을 돌리자. 나는 울먹이면서 외삼촌에게 연락하였다.

     

    , 무슨 일이냐?”

     

    “ ...외삼촌, 어머니가 돌아가셨대요.”

     

    “ ...갑자기?”

     

    . 고독사래요.”

     

    “... ... 허참, 너희 엄마는 끝까지 삼촌 마음에 대못을 박고 가는구나.”

     

    그렇게 긴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묵직한 이야기가 오갔다.

    두 번째는 직장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 전에 나는 남자친구에게 연락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서럽고, 괴로우면서도 동시에 안심이 됐다.

    하지만 숨소리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아 한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핸드폰만 붙잡았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림에도 대답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눈물이 났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겨우 그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남자친구는 지금 이곳으로 오겠다며 기다리라 했다.

    나는 알겠다. 하고 전화를 끊고 올라가서 직장 상사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시설장님은 출장을 나가계셨기에 나를 담당하는 다른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대요. 그 한마디가 괴로워서 아파서 다시 눈물이 났다

    겨우 진정했는데 이야기 꺼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직장 선생님들은 놀랐고 나를 진정시켜 주며 이곳저곳에 통화를 같이 돌려줬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이 있는지 다독여 주었다.

     

    빨리 현장에 가봐야 하는데 차마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곳에 부패가 진행될 정도로 혼자 있었다는 게 내 눈으로 직접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지내고 있는 자립 생활 주택의 사례관리자 선생님이 대신 가서 물품과 이야기를 전해 들어 주었다.

    나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며 선생님들과 장례식장에 대해 알아보았고 결정해야만 했다.

    평화로운 하루였는데 분명 한 순간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했다.

    쉴 새 없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었다.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쯤은 장례식은 2일장으로 외삼촌이 이곳에 오겠다는 말이었다.

    올 사람도 없지만 그럼에도 짧게나마 진행한 이유는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남자친구가 내 옆에 계속 있어주고 직장 동료들과 교회 사람들과 친구들이 와 줘서 다행이었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구나.

     

    곤란했던 거라면 역시나 입관할 때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삼촌은 다리가 많이 좋지 않아 쉽지 않았고, 친척들도 외삼촌과 외숙모만 오셨기에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한 명은 채워졌지만. 셋은 더 필요한데 어떡하지? 그러던 찰나, 파도손에서 도와주기로 하였다

    너무 감사했다. 그들의 개인적인 시간을 내주고 멀리 화장터까지 같이 이동해 주었다


    화장터에 들어가기 전 고인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도 기억도 

    다 화장터에 같이 태울 테니까 엄마도 내가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나는 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했다.


    잊히지 않을 줄 알았던 상처는 어느새 나보다 더 작아졌으며 흔적만이 살짝 남아있었다.

    웃기게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사실 나를 사랑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마지막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비참한 삶이었지만,

     

    비록 비참한 끝맺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딸은 사랑하며 사랑을 주며 살아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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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ar님의 댓글

    Star 작성일 Date

    들가을달 님에게 살짝 질투를 느낍니다.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어머니를 사랑한다니...
    저는 이제 제 유년시절 탓을 하기도 지겹긴 하지만, 제가 생판 남에게 한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절절 메다가 결국 반자동적으로 이런 날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 욕을 안팎으로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더라구요.
    .....물론 (육체적인 의미에서였든 아니었든) 순수한 편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야 낫긴 하지만, ..글쎄요. 그런 식으로 순수하다면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걸, 살짝 저주스러운 마음이 솔직히 안 드는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저도 이젠 헛소리는 그만하고 슬슬 분발해야 할 것 같아요. ..소재지가 해외에다 미국 남부다 보니 '예쁜 백인 소녀들' 아니면 '역사적 상처를 지닌 흑인 무리'와 친구하고 지내는 것 자체가 지금의 저 상태에서는 가히 불가능에 가깝다 느낍니다만

    인간 세상 사는 게 뭐겠어요. 결국 즐길 수 있을만큼 즐기고 자기 할 역량만큼만 해내고 가면 되는 거지. 너무 욕심 내다가 탈 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이미 경험상으로 깨달았으니.... ..

    그런 의미에선 날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