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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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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파견일지 (4)- 안개가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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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헤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47회   작성일Date 23-07-2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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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파견일지 (4)

    - 안개가 끼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아니, 해가 중천에 떴다고 말해야 정확할지도.

     

    몇통의 부재중 전화와 몇 통의 카톡이 남겨져있었다. 나는 무단 결근, 혹은 지각을 한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전부 먹어버렸던 저녁약을 나는 견뎌내질 못했다. 결국 내 불안함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난 약이 필요하긴했으나 이겨내지는 못했다.

     

    나약한 나자신이 혐오스럽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감정은 차분하다. 아니, 멍하다고 해야정확하지 않을까.

     

    나를 찾는 부재중 통화와 몇 통의 카톡을 멍하니 바라보며 상황을 인지한 나는 조심스레 사무국장님에게 전화를 건다. 베이직 병원에는 어떻게 연락할지 알 수 없으니까.

     

    아마 어제의 일로 내가 급성기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불안함을 풍기던 어제의 내가 분명히 있었으니까.

     

    정신은 또렷하지도 흐리멍텅하지도 않은 그 어딘가에서 안정감있는 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착각이 깨진 것은 몇 분도 되지 않는다. 혀가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발음이 뭉개지고 어떤 말을 할지 생각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이 낮설고, 말하는 것이 어렵다.

     

    물에 빠져도 입만 살 것 같은 나라고 했는데, 그 몇 없는 장기마저 쓸모없어졌다면 나는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묘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나약하다, 그저 멍청하고 아무 가치 없다. 그런 비관적인 생각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다.

     

    약에 취했고, 약은 정신 활동 모두를 무뎌지게 했다. 그건 관조의 태도가 아니라 감정이 사라지고 뇌 일부가 마비된 것일 뿐.

     

    잘 알지만, 동시에 잘 모르겠다.

     

    멍해진 정신으로 지금의 내 상황을 두서없이 말했다. 말이 어렵고 발음이 어렵지만, 안간힘을 써서 똑바로 말하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출근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기에 그리하겠다 말했지만, 그 판단이 옳지는 않아 보였나 보다.

     

    아니면, 파도손으로 출근하라는 사회복지사의 말이 함께일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맞았던가.

     

    그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할겨를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저 전화 저편의 사무국장님의 말씀만이 들린다.

     

    출근하지말고 쉬어. 그리고 내일은 파도손에 나와.”

     

    그건 하나의 판결이었다. 파견지에서 쫓겨났다는.

     

    당장 무엇하나 결정되지 않은 상황.

    분명 병원에서는 잠시 쉬다가 다시 돌아와도 된다고했는데, 혼란스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할뿐이다.

     

    잘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함조차 없는, 판단이나 생각을 하기도 어려운 바보같은 상황이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사고는 나를 좀비처럼 만든다.

     

    그래도 하루는 지나가야하고, 나는 삶을 살아야만한다. 생활을 위해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내일을 보내기 위해, 오늘을 보내기 위해, 식사와 외출을 하기 위해, 쾌적한 실내를 위해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들을 기계적으로 해낸다.

     

    난 이대로 괜찮은 걸까.’

     

    모르겠다. 그저 멍할뿐. 오랜만에 모두 먹어본 저녁의 약은 나를 굼뱅이로 만들고, 또 어찌보면 달관한 스님처럼 만든다. 감정이 마모되고 생각이 마모되고 체내의 시간이 느릿해진다.

     

    그럼에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삶을 산다. 삶은 이어지는 것. 무엇하나 멈추지않는 것. 그리고 변해가는 것.

     

    그것이 절망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어느 한점에 멈추지 않고 변해간다. 정체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착각일뿐.

     

    나의 증상이 어떻고, 나의 기분이 어떻고, 나의 상황이 어찌되었든 여지 없이 하루는 흐르고, 나이는 들어가고, 사건들은 일어나며, 그에 따라 나는 변해간다.

     

    이미 벌어진 것은 되돌릴 수 없고, 현재의 삶은 실존하며, 내일로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기에, 난 하루를 충실해야만 한다. 내일의 나를 지금의 나로써 만들어가야한다. 언제나 나는 현재라는 시간의 선에 있었고, 언제나 나는 현재에만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불안을, 불만을, 걱정을 과거에 던져 놓자.

     

    나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나는 후회할 시간이 없다. 무엇을 할지 생각할 시간만 있고, 무엇을 행해야할지 결정해야만 할 시간만이 있다.

     

    멍해져버리고 마모되어버린 감정과 사고속에서도 나는 속으로 되뇌인다. 걸어가라고, 멈추지 말라고.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라고.

     

    불안과 걱정은 어쩔 수 없더라도 멈추지도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미래에 대한 공포로 좀먹히거나 자신에 대한 혐오로 좀먹히지 말라고.

     

    그래봐야 제 자리일 것을 나는 안다. 그래봐야 나에게 좋을 것이 없음을 나는 안다. 몇 번이고 경험해 보지 않았나. 몇 번이고 체감해보지 않았나.

     

    과거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루를 추스르고 다시 약을 먹는다. 이번에는 멍해져서 못 깨어날지도 몰라 다섯 알을 덜어냈다. 무엇을 먹을지 일일이 고르기보다는 그냥 아무것이나 다섯 알을 빼버렸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리스크가 있어 보이는 선택이지만 또 무단결근으로 급여를 깎아 먹을 수 없고, 나는 일어날 자신이 없다.

     

    조금씩 증량한다면 몸의 부하는 몰라도 늦게 일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욕심내지 말고 조금씩 저녁 약에 익숙해지자.

     

    약이 주는 무게에 익숙해지고, 나아가는 것 같으면 그때 다시 의사와 함께 약을 덜어내자. 줄여가자.

     

    하루가 그렇게 멍하니 지나간다. 오후 늦게 가 되어서야 약에서 온전히 벗어나고, 불안이 다시 올라오나 싶었지만 어떻게든 견디어냈다.

     

    내일의 나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아무것도 모를 오늘 속에 불안과 걱정을 껴안고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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