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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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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주의

    당사자에게 직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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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헤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38회   작성일Date 23-07-20 14:10

    본문


    사람은 왜 일을 해야만 할까?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까?

     

    그저 당연시 여기는 일이 누군가에겐 간절할 수 있음을 20대의 나는 알지 못했다.

     

    30대 중반이 되어 장애인 취업에 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번번이 합격하지 못했고, 그 자리는 다른 신체장애인이 차지했다. 그리고 나는 취업도 못하는 어중간한 존재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생활이 벅차졌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휴대폰 결제를 이용해 한도까지 상품권을 구입하고 상품권을 앱을 통해 전환, 현금으로서 통장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아끼던 헤드폰도, 핸드폰도, 패드도 모두 팔아야만했다.

     

    실업급여가 사라진 뒤의 나는 늪 깊숙하게 잠긴 것처럼 모든 것이 버거웠다. 그래도 살아야하기에 내일을 위해 살아야 하기에.

     

    열리지 않을 문을 쉼없이 두들겼다, 끝내는 아무 곳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파도손은 나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그건 가뭄의 단비였고, 구원의 천사가 강림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어디보다 당사자가 편히 일할 수 있고, 나름 익숙해서 쾌적한 업무를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결국, 파도손애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실업급여가 끝나는 시점 전에는 취업할 거라 막연히 믿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내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르고, 다른 이유가 더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의 일이란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치유의 길이다. 또한, 사회의 복지 부담을 줄여주고, 가족의 부담도 줄어든다. 독립 주택의 당사자들에게는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고, 좀 더 많은 이들이 비당사자와 어울려 일할 수 있는 모범 사례가 되어준다.

     

     

    첫째로 우리 당사자는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

     

    스스로가 돈을 벌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그로 인해 부정적인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난 이런 것 못해가 아닌, 난 이런 것도 해가 되어가는 것. 그것이 일하고 일을 한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것에 있다. 부모님에게도 다른 지인들에게도 조금은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을 한명의 사회인으로서 사회속에 녹아들 수 있다.

    사회의 경계, 그 어딘가로 내팽개쳐지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정당한 대가로 얻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생계를 해결하거나,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있다. 서먹한 관계가 회복되는 기폭제가 되주는 경우도 있기에, 우린 정당한 대가를 받고 정당하게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둘째, 일하게 되면 우리는 사회 속에 제대로 살고 있다는 감정을 느낀다.

     

    아직은 버거운 일 처리에 힘겨워도 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여기는 이유는 언젠가 다른 비당사자들과 다를 바 없이 일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자존감 상실로 가려졌던 자신의 재능 같은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음을 보았고 믿는다.

     

    거기에 작업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오래 걸리기는 하나 점차 회복될 수 있다.

    학습이 느린 분들도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그건 당연하기에 기다려 주지 않고 제멋대로 당사자를 끌고 다니고 답답하다 욕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들은 사회의 저 너머 어딘가에 유리된 채 오래도록 마모되어서 많은 것들을 잃고 자신감과 자존감 또한 잃어버린 상태다. 게다가 정신과 약물로 인해, 혹은 증상으로 인해 자신은 일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가족도 그렇게 말하며 지인들조차 그리 말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 놓이는 당사자들은 삶의 체감이 어렵다.

     

    어떤 비당사자도 격리된 채 오랜 시간을 보내면 당연히 작업능률이 안 나오고 사회적인 부분도 일그러져 버린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고.

    당사자들이 겪는 격리의 시간들은, 길든 짧든 자신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을 잘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산산 조각낸다.

     

    교육이나 훈계가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한 번쯤은 그게 정말 맞는지 생각했으면 한다. 혹여 내가 멋대로 그렇게 재단하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번만이라도 숙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사자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일을 함으로인해 어둡고 우울했던, 그리고 불량품 같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로서 한사람 몫을 하며 사회인으로서의 충실감,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홀로도 살아남아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뿌듯함.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을 재정의된다면, 우리들 당사자는 승화라 불리는, 내부의 정신적 고통만 중점으로 보던 시선을 외부로 돌려 누구보다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그런 승화가 일어날 것이다.

     

     

    셋째 당사자는 사회로부터 격리하게 시키려는 시도를 줄일 수 있다.

     

    당사자와 함께 일하며 그들이 가진 편견과 혐오가 점차 지워져 가고 한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초반 하는 일처리가 불안하고 느릿한 모습을 보일 수는 있다. 학습능력도 현저히 떨어져 그 모습이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기회를 주는 것이 당사자의 일자리고, 바로 옆에서 숨쉬는 당사자가 무서운 괴물이 아님을 비당사자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초반에는 여러 의미로 불안할 거라는 걸 알긴 한다.

     

    직접 마주 대한 적 없어도 위협적으로 기사가 나는 것들이 혐오와 공포를 조장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티비에 나온 피해자가 자신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일할 권리를 찾아 떠난다면, 그 꾸준함이 빛을 발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편견과 혐오로 가득한 그들이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우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재사회화는 강제로 입원하고, 환경 안 좋은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것과도 연관이 깊기에 우리를 보이는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관계자들의 변활 이끌어낼 것이다.

     

    급성기의 환자들에게 격리만이, 강압적인 치료만이 전부라는 태도가 변화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예시처럼 그렇게되겠지.

    다만 언제가 될지 너무 불투명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착실히 해나가면 된다. 확실히 일하려는 모습을 본다면 많은 곳에서 동료지원가든 정신 장애인 일자리든 당사자들이 직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까?

     

    모든 것은 모르거나 편향적인 경험이 만들어내는 혐오라는 괴물을 만드는 것이기에, 실제 하고 옆에 있는 당사자의 모습이 그들이 가진 편견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적어도 미지의 무언가로서의 공포는 없어지겠지.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병의 모습들에도 조금씩 마음을 열겠지.

     

    우리가 보이지 않기에, 가까이 있어도 증상만을 관찰하느라 다른 것을 볼 수 없기에, 더욱 미지의 무언가가 되고, 환상속의 괴물이 되는 것이다.

     

    넷째, 다른 당사자들의 롤모델이 되어주어 사회로 나갈 용기를 전해줄 수 있다.

     

     

    같은 당사자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조그만 믿음이 생겨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실제로 조금씩 사회에 섞여들어가기도 한다.

     

    언제까지나 복지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번돈으로 스스로의 생계를 유지하고 하고픈 것들을 다양하게 해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당사자들 뿐아니라 그들의 가족 혹은 지인, 혹은 친구들에게 조그만 희망을 줄수도 있고, 그들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줄 수도 있다.

     

    그렇게 나아 가다 보면 사회적인 복지 부담이 점차 줄어들고, 가족들의 부담도 마찬가지로 덜어지게 된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더라도 당사자에게 일은 더욱 큰의미로 다가온다. 사람으로서의 존엄의 가치가 된다.

     

    결국, 당사자는 살고 싶기에 일한다.

    당사자는 사회 속에 있었고 있고 싶다.

    우린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일 뿐이다.

    우리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뿐이다.

     

    그리하여 일로서 스스로의 생계를 유지하고, 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일로서 사회의 편견에 맞설 수 있다. 당사자는 그 누구보다도 일할 권리가 필요하다.

     

    당사자의 일은 치유이자 구원이고, 축복이다.

     

    우리는 오늘도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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