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케이-팩스'K-pax']를 통해 본 당사자의 이미지-헤타 동료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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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slownews.kr/60982(케이팩스)
작성자 :헤타(파도손동료지원가)
저는 정신질환자입니다. 정신질환자가 사회에 형성하는 이미지가 어떠한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정신질환자와 병원이 자주 노출되는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SF 영화 [케이-팩스] (K-pax)를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필자)
영화는 부산한 기차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노숙자로 추정되는 전역군인의 구걸 장면입니다. 전역군인은 동냥하다 말고 빛이 세어 들어오는 기차역 광장에 시선을 빼앗기게 됩니다.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긴 듯, 본능적으로. 그곳에서 주인공 ‘프롯’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납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순식간에.
때마침 전역군인과 프롯의 주변에서 강도가 발생하고, 강도를 당한 피해자가 바닥에 쓰러지자 프롯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경찰은 피해자의 ‘강도야’라는 외침에, 도움을 주었으며, 전역군인과 피해자의 강도가 아니라는 증언이 있었음에도 그에게 강압적으로 취조하고 신체를 구속합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가볍게 웃으며 매너 있고, ‘상식적’이며 온화한 모습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의심스러운 듯 질문을 이어갑니다. 여행하고 돌아오셨냐는 질문에 이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었을까요? 짐이 어디 있냐는 것을 묻고, 그것이 없음을 조롱하듯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기차역에 기차가 아닌 다른 것으로 이동해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 듯합니다. 거기에 프롯은, “이제 보니 이 행성은 정말 밝군요.”라는 발언으로 쐐기를 박습니다. 그 자신을 외계인으로 자칭한 것이지요. 경찰은 그를 환자로 규정 국가가 운영하는 (혹은 지원하는 듯 보이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됩니다. 무슨 범죄자를 연행하듯.
아무렇지 않은 ‘편견’
사람들은 플롯을 연행하는 장면에서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늘 그려오던 이미지’이고, ‘상식적’인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외계인’임을 암시하는 발언을 빼면, 프롯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습니까? 정확히 질문을 이해하고, 정확히 답변했으며, 미소 속에 부드럽고 매너 있게 대답했습니다. 자신을 구속하려 함에도 어떠한 저항이나 폭력적인 행동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지 않는 듯 보임에도 말입니다.
그가 웃으며 여유로운 것이 ‘비정상적’으로 보인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말이 만약 진짜라면, 혹은 그렇게 여기고 있다면 그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여행지를 둘러보는 신기함과 들뜸이 가득한 상태이며, 그 행성의 문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이 ‘비정상적’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가 그러한 ‘망상’에 시달리는 이라고 할지라도,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며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해 불가피한 신변의 ‘구속’이 필요한 환자라고 보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의 ‘외계인’이라는 정체성이 문제인데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한국인’이라고 믿어왔지만, 사실은 ‘미국 시민권자’였다고 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제는 ‘소통’의 오류
‘한국인’ 대신 ‘외계인’, ‘미국 시민권자’ 대신 ‘지구인’을 넣어도 이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보의 오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의 오류’가 치명적인 인지 장애를 일으켜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가에 있는 것 아닙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그는 격리되어야 할 정도의 위험한 자이고, 그는 격리되어야 할 정도로 소통에 장애가 있었습니까? 아니, 소통의 장애는 신변의 구속 사유조차 되지 못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위험성’을 이야기한다면 분명히 불가피한 구속사유는 될 수 있겠죠. 그러나 소통의 장애만으로 사람을 격리한다는 것이 옳은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 장면을 당연하게 넘겼을 겁니다. 같이 보던 저의 지인도 그러했으니까요. 그게 ‘이미지’입니다. ‘정신질환자는 그렇게 병원으로 보내도 상관없다.’는 이미지. 또한 ‘격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미지. 이 글을 보시는 당신께서는 그런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우신가요? 얼마나 그런 장면들에 이상함을 느껴보았나요? 생각해 보았나요? 아니, 기억은 하고 계시는가요?
프롯은 시종일관 자신이 외계인임을 주장하며 일관성 있게 이야기를 해나갑니다. 제대로 이야기를 이해하고 제대로 이야기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의사’라는 사람은 어떠한가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환자는 망상에 시달리니까 제대로 이야기는 하지 않아.’여서인지, 그는 프롯의 이야기를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이해’하지 못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망상증 환자’인 프롯보다 의사가 더욱 소통의 장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사는 그의 큰아들과 오랫동안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누가 더 환자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외계인이라는 망상을 제외한 프롯이 정상인이라 규정하는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정신질환자라 규정하기도 어려울 만큼. 프롯은 과학자보다도 더욱 정교한 자전 궤도를 계산해냈고, 프롯은 의사보다 더욱 분명히 환자를 치료해냈습니다. 그를 정신질환자이기에 격리해야 한다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정보의 오류’일 뿐이고, 그리고 그 ‘정보의 오류’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 있다는 것뿐입니다.
정상? 비정상?
프로이트는 약간의 편집증, 약간의 강박증, 약간의 히스테리 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신 질환’들이 비정신질환자에게도 조금씩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질적인 차이지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는 옛 시절의 인물이고 지금의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끼친 이라 해도 현재 심리학계 전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생각하게 하지 않는가요? 누구나 ‘정상’이라 생각하나 ‘질환’이라 불리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사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이 허구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불편함이 존재할 뿐이죠. 무의식의 존재를 이야기한 프로이트 시대 이후에 그 많은 발전을 이룬 심리학계에서 무의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진보를 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뇌를 완전히 해독할 수 없고, 우리와 똑같이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 수 없듯, 우리가 저 안드로메다를 향해 비행할 수 없듯,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르고, 많은 것에 확실함이 없습니다.
차이 차별
우리가 밝혀낸 우주는 기껏해야 지구에서 조금 벗어난 태양계뿐이고, 우리의 생활영역은 고작 지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얼마나 크고, 또한 우리가 밝히지 못한 지구 내부의 것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우리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정상이라는 것이 ‘다수’의 ‘보편적인’ 것이라면,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이 커다란 우주의 ‘절대다수’라고 표현 할 수 있습니까? 아니,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애초에 그렇다 할지라도, ‘나와 다른’ 것을 모두 ‘비정상’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입니까? 정신질환이 아닌, 개성이라 불리는 것을 이야기할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합니까? 정상이냐 비정상이냐가 아닌, ‘질환자이냐’, ‘비질환자이냐’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세요.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우리 정신질환자들을 ‘비정상’이라 표현하고 생각하고, 당신은 어떠했는가를, 또한 주변은 어떠했는가를.
사회와 격리된 삶
영화에서는 프롯에게 최면을 걸고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던 중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때, 저와 같이 보던 지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발작으로 부인과 딸을 죽였나?”
정신질환자의 병적 증상이 범죄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영화의 흐름상 만약 비질환자라 할지라도 외부의 다른 요소를 추측할 수 없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끔찍한 일에 최악의 죄인 살인을 떠올리기도 쉬울 거고요. 다만 생각해봅시다. 정신질환자가 범죄자 이미지로 이 사회에 얼마나 소비됐는지. 영화에서, 만화에서, 드라마에서.
무시 차별 조롱 격리 폭력 차별 소외 슬픔 고통
그리고 다시 한번 저 말을 생각해 봅시다. 발작이 당연히 범죄를 저지른다는 이미지가 녹아들어 있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신 분이 얼마나 계실까요? 얼마나 그 연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질환자, 특히, 사회에서 연상하는 조현병은 1% 내외로 존재합니다. 그런 그들의 상당수가 병원 혹은 사회와 격리된 체 살아가고 있고요.
그런 상황에서 범죄나, 범죄자가 많을 수 있을까요? 애초에 숫자 자체가 다릅니다. 또, 생각해 봅시다. 병원에서 격리조치를 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위험성’을 가지고 있을 거로 생각합니까? 의사들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 판단은 그다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처럼 정신질환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나라에서 그런 ‘위험성’을 쉽사리 무시하기가 쉬울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실제로도 범죄 확률은 지극히 낮으며, 약물을 복용하고 치료를 진행할 경우 증상이 완화되거나 혹은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한가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로 낙인찍고 있지는 않은가요? 혹은 격리해야 하고, 끔찍한 오작품이며,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별나라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희생되어도 좋을 소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에 속해있고, 사람들 사이를 살아갑니다. 사람으로서. 그래요, 우리는 ‘이상’이 있고, ‘질환’이 있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소통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보일 수는 있지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속의 정신질환자는 어떠한 이미지인가요?
해마다 격리된 환자들이 늘어가고, 왜 정신병은 숨겨야 하는 치욕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걸까요? 우리도, 정신질환자도 당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격리되어도 마땅한, 희생되어도 좋을 소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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