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취약한 나의 아버지와, 그들 (2020년 서울시 장애인가족 문화예술축제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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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취약한 나의 아버지와, 그들
아빠를 못 본지 9개월이 지났다.
실은 아빠를 못 보았던 기간은 내가 4살이었을 때부터 대학생활을 하던 22살까지가 가장 길었다. 그 당시 엄마와 친가 친척 분들은 모두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다. 나는 아빠가 교도소 같은 데에 계셔서 우리와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하늘을 보며 ‘아빠! 나 잘 지내고 있어, 아빠도 잘 지내고 있지? 늘 힘낼게요!’ 라고 되뇌이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하면 아빠한테 가 닿을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22살 대학생이 되어 나는 처음으로 남자친구와의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 때까지 우리 가족은 아빠의 부재, 엄마는 직장생활과 집안일을 두루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일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대화가 없고 차디찬 분위기가 우리 집을 채우고 있었다. 첫 실연을 겪은 나는 모두가 이별을 겪고 아파하듯 나 또한 많이 힘들어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엄마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싶어 엄마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나는 엄마에게 “엄마, 재혼하고 싶으시면 재혼하셔도 저는 괜찮아요”라는 말을 꺼내게 되었고 내 예상과 달리 엄마는 “그럼 아빠는? 아빠는 어떡하고?”라는 말을 하셨다.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시점이었다. 그 때서야 아빠를 볼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조현병으로 20여 년간 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그 긴 기간 동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사람은 엄마와 할아버지 뿐 이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나는 그리도 그리웠던 아빠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엄마에게 아빠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아빠 보고 놀랄 수 있어. 이도 많이 빠져있고.. 겉모습으론 많이 놀랄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2주 뒤 난 드디어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엄마 말씀대로 아빠는 많이 초췌해 보이셨다. 아빠로부터 “너 때문에 견딜 수 있었어” 라는 말을 들었고 난 1주일간 누군가 말만 건네도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나의 22살부터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번 아버지를 보러 병원에 갔다. 고작 점심 한끼 같이 먹는 게 다였고 아빠와 우리 가족 간의 잃어버린 시간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빠와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으로 실연의 아픔을 겪었던 나는 그 후 1년간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다. 좋은 성적과 교환학생 프로그램 합격으로 나는 나의 자존감을 끌어올리려 했다. 내 그릇에 비해 너무 큰일을 했던 것일까, 아버지의 병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미국에 있는 병원에 3일간 입원하면서 엄마와 처음으로 전화통화를 하게 된 날 나는 엄마에게 “아빠를 이해하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아요.” 라고 말했고 그건 진심이었다. 그 덕분인지 한국으로 돌아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다른 환자들과 달리 포용하는 자세로 병원 생활에 임했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서인지 3개월만에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나 오빠보다 아빠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우리를 만나면서 퇴원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나는 폐쇄병동의 답답함을 알기에 아빠를 꺼내주고 싶었지만 돌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엄마와 오빠는 반대했다. 그래도 그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아빠가 바깥 공기를 쐴 수 있게, 가족들과의 따뜻함을 느끼실 수 있게 아빠를 만나러 갔지만 코로나가 터지고부터 병원은 폐쇄 되었고 아빠는 9개월 동안 가족을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으셨다.
정신질환자는 위험하기만 할까? 뉴스에서 종종 나오는 기사를 접하면 조현병 환자는 일반인보다 쉽게 살인을 저지른다는 얘기가 자주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2017년 대검찰청 범죄분석을 보면 전체 범죄 중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은 0.136%이고 일반인구의 범죄율은 3.93%로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은 일반인의 범죄율의 고작 1/28배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론을 통해 조현병=살인 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지만 실은 조현병 환자 중에서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결국 조현병이 원인이 아니라 인격장애가 원인이라는 말이다.
아빠의 형제자매들마저 아빠를 만나지 않았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정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매우 심한 것 같다. 편견은 무지할 때 생긴다고 한다. 정신장애인은 위험하지 않다. 정신 장애인은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 그들도 헌법 제 10조에 나오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기회의 균등과 주거 및 사생활의 자유,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근로의 권리 등을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하지만 한번 살펴보자. 폐쇄병동에 수십년간 입원해있는 (결과적으로 갇혀있는) 정신장애인들에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가? 주거 및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뉴스에서 조현병 범죄를 강조할 때마다 조현병 환자의 취업은 막히곤 하는데 그들에게 근로의 권리가 보장되는가? 뉴스에서 조현병 환자의 강력범죄가 회자될수록 사람들은 조현병 환자의 공격성에 압도당한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성은 입원 후 약물치료를 2주만 받아도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왜 수십년씩 그들은 갇혀있어야 하는가?
경기도립정신병원의 간호사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사람, 정신병이 발병하고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되면서 공포를 느끼고 혼란스러워 하는 한 정신 장애인이 있었다. 병원은 다른 병원들이 으레 하는 대처방식인 안정제를 투여하는 것 말고 옆에서 손을 잡아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너무나 신기하게(간호사의 표현이었다.) 그 환자는 수 분 내에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약을 투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조현병의 여러 증상들은 약을 통해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정신장애인들도 다른 사람의 따뜻함을 느끼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혼란스러워 하며 공격적으로 보이는 정신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ㅡ 정신 장애인을 힘으로 제압하고, 그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경찰이 아닌 ㅡ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대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따뜻한 대우를 받았을 때 정신 장애인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공격적인 언행을 하지 않게 된다.
코로나가 터지고 두달 뒤인 2월 20일에 경북 청도대남병원 사건이 터졌다. 한 조현병 환자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폐렴 증세로 사망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 중 첫 번째로 사망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도대남병원에 20여년간 입원해있던 장기 환자였고, 사망 당시 그의 몸무게는 42kg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42kg, 나는 이것이 그가 오랜 병동생활을 하면서 건강 관리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한다. 청도대남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은 장기입원환자가 많았다. 첫 번째 사망자와 비슷하게 그들 중 대부분이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 청도대남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12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이 중 8명이 사망하였다. 국내 확진자 사망률이 1%였던 것을 본다면 청도대남병원의 사망률은 7.8%로 매우 높았다. 또한 사망자 8명 중 7명은 확진 후 나흘만에 사망했다. 왜 이렇게 확진자 발생 초기에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7.8%라는 높은 사망률을 보였을까? 그 원인을 찾으려면 정신병원의 환경적 특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정신병원은 정신질환자가 자해와 타해의 위험성이 있다고 여기므로 창문을 열 수 없게 되어있다. 창문을 열 수 없기에 코로나 예방에 너무도 중요한 환기를 할 수 없었고 환자들은 감염되기에 너무나 쉬운 환경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청도대남병원에서 그렇게 많은 수의 확진자와 사망자가 나오게 된 것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대구 달성군에 소재하는 정신병원인 제2미주병원에서는 청도대남병원을 훌쩍 넘어서는 134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청도대남병원과 제2미주병원은 환기를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환자들이 온돌식 방에서 6~8명씩 함께 지내며 밀접접촉이 불가피한 환경이었다. 이는 코로나에 대한 정신병원의 물리적 취약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또한 청도대남병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코호트 격리가 시행된 곳이었다. 코호트 격리가 시행되고 환자들은 20여일간 한방에 6~8명이 함께 지내는 것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2월 15일 전후에 집단 발병 증세가 있었고 타 병원 이송은 3월 5일에서야 이루어졌다. 적극적인 치료가 코로나가 발병한 뒤 20여일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 것이다. 과연 일반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에 병원이 이렇게 늑장을 부린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 그리고 나는 여기서 작은 의문을 던진다. 코로나에 감염되기 쉬운 환경이었던 신천지의 다닥다닥 붙어앉는 환경을 보며 사회는 손가락질 하고 신천지를 욕했다. 그렇다면 6~8명이 한방에서 함께 생활해야했던 청도대남병원과 제2미주병원의 환경에는 왜 큰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을까? 나는 이 점이 우리 사회가 정신장애인이 일반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여기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여러 겹의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아 발병한 정신장애인은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과도 같아서 작은 공격에도 우울해지는 등 많이 힘들어하곤 한다. 나 또한 2번의 입원경험과 오랜 시간동안의 사회와의 단절로 인해 고립되고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나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와 같은 정신 장애인을 상담해주는 동료상담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정신장애인의 회복에 동료상담가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아주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여러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있다. 과부 설움은 홀아비가 안다고 했던가. 마음의 상처로 아픈 정신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고 대변해줄 수 있는, 먼저 회복한 정신장애인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나와 나의 동료들, 동료상담가로 일하게 된 우리는 일을 시작하기 전보다 무척이나 많이 성장했다. 이는 우리의 잠재적인 능력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광산을 캐던 과거에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데리고 동굴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유는 인간에겐 해가 되지 않는 수준의 아주 미량의 일산화탄소에도 카나리아는 죽기 때문이었다. 카나리아가 죽는 걸 보고 광부들은 위험을 감지해 안전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 정신과의사이자 조현병 환자인 다니엘 피셔의 저서 ‘희망의 심장박동’에서도 나오듯, 나 또한 정신장애인이 우리 사회의 카나리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상해보이고 위험해 보이지만 실상은 마음의 근육이 약한 정신장애인들을 만약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품을 수 있게 된다면 다른 그 어떤 약자들도 품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감히 약속할 수 있다. 그런 사회가 된다면 정신장애인들 또한 자기 방어를 위한 공격적인 행동들이 분명 줄어들 것이라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며 나는 이번 주에도 아버지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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