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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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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 our own 소감문(9)-전00 절차보조 동료지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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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파도손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317회   작성일Date 20-10-07 10:32

    본문

    5. 사람들이 미칠 때


    의사나 일반대중 사이에서조차 정신건강과 정신병/정신질환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병/정신질환으로 레이블되는 행동의 종류들은 “범죄”나 “부도덕”과 같은 말끔한 카테고리에 맞지 않는 일탈적인 행동들이다. 일탈의 특정한 종류들을 “병”으로 부르는 것은 이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협약이긴 하나, 그것이 단지 이론적인 구성이라는 것을 동의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실로 받아들인다. 정신병에 대한 과학문헌의 대부분은 이런 방식에서 치우쳐 있다: 묘사되는 행동이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숙고조차도 되질 않는다. 그것이 진실로 질병이어야만 정신과의사들은 정신병/정신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에 전문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의사들은 객관적인 의학적 소견으로 변장한, 행동에 대해 단순히 도덕적인 선언을 만드는 것이다. 정신과의사들은 행동의 어떤 종류들을 정신병으로 부름으로써 행동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의미도 무효로 만드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시각에서 행동은 단지 “증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과의사들이 행동의 어떤 종류들을 정신병으로 부름으로써 그들이 설명하기를 시도하면서조차도 원인들을 덮어 감추고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정신병/정신질환에 대한 의료모델에서 인간의 감정은 증상으로 변환된다. 행동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에서 의미를 갖는다: 정신의학적 레이블링은 특정한 행동을 분리하고 병의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행동이 평판을 떨어뜨리게 된다면,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의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신의학적으로 레이블하는 과정은 예외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다. 정신의학적 레이블링은 본질적으로 낙인을 찍는 과정이다. 위기에 있는 사람이 느꼈던 정서적 고통과 어려움은 그가 친밀함과 정서적 지지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떠나가는 것에 의해 확대된다.

    대개 한 사람은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기에 정신적으로 아프다고 의심된다. 낙인효과 때문에, 정신병/정신질환로 레이블되는 것은 사람들이 피하기를 시도하는 결말이고, 결국 그 레이블이 붙여진 사람들은 저항할 가장 적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정신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로 이름 짓는 것은 그 사람이 기대에 부응하여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종종 이상하거나 겁나게 만드는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서 반응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불행을 의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사람들이 바뀌고,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여전히 최소화하는 가설일 뿐이다.

    주디 챔벌린의 경험에 따르면 애정 어린 돌봄을 강조했던 분위기에서 비로소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모습의 정신병원은 애정 어린 돌봄과 성장의 이 분위기를 제공할 수 없다. 정신과적 병원입원을 초래하는 상황들은 종종 정서적 갈등을 포함하고, 결국에 정신과환자로 끝나게 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가장 약한 관계자이다.

    제도 정신의학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일한다. 정신의학적 “현실”은 가장 관습적인 조건에서 정의된다. 관습을 좇지 않는 극적인 삶의 선택은 빈번하게 정신병/정신질환의 증거로 인용된다. 정신의학적 레이블링으로 가장 연약한 관계자의 개인적인 인식을 무효화하는 것은 의학적인 용어로 가면이 씌워진 순응에 대한 요구이다.

    사람들이 감정적 엉킴에 붙잡힐 때, 모든 사람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반응들은 정상적이라거나 아픈 것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의학적 진단으로 위장한 도덕적 판단이다. “아프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것을 더 안 좋게 만드는 것은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든 사람이 (아마도 “미친”사람을 제외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 과정의 신랄한 사례는 다큐 ‘내일은 서둘러’에서 나타난다. 중년의 소방관으로 묘사된 환자는 면회에서 부인과 딸에게 그가 집으로 오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빈다. “당신은 집에 올 수 있어요.” 그의 부인이 말하기를, “당신이 건강해질 때.” 그가 아프지 않다는 그 남자의 반복되는 저항들은 의사와 그의 가족 모두에 의해 얼마나 그가 정신적으로 아픈지에 대한 뚜렷한 증거로만 보아진다.

    6. 정신과환자들의 협회 내부


    정신과환자들은 그들의 어려움을 치료하기 위해 전문가의 전문지식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증상”으로 생각하도록 배운다. 일이나 살 곳을 찾는 일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들조차도 전반적인 정신의학적 프레임 내에서 사회복지사들에 의해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프레임 내에선 환자나 이전환자가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들이 정신병/정신질환에 대한 징후로 비춰질 것이다. 도움은 오직 전문가들로부터만 오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환자들은 또한 서로를 불신하도록 배운다.

    환자들이 운영하는 대안들은 이러한 장벽들을 무너뜨린다. 전문적인 감독이나 통제없이 이전환자들이 함께 일할 때 그 어느 누구도 열등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서비스들의 굴욕적인 특징들(예: 비공개되는 파일이나 회의)은 제거된다. 환자들은 완전히 새롭게 서로에게로 방향을 틀고, 서로를 지원하는 따뜻한 방식에서 평등한 관계가 주는 도움을 찾을 능력이 있다. 이전환자들을 위한 대안 서비스 모델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1. 서비스는 클라이언트들에 의해 정의된 필요들에 맞게 도움을 제공해야만 한다.
    2. 서비스에서의 참여는 완전히 자발적이어야 한다.
    3. 클라이언트들이 다른 부분에서 참여하도록 요구됨 없이 서비스의 일부 측면에 참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4. 도움은 서비스를 받는 클라이언트들이 서로에게 제공하고, 클라이언트가 선별한 다른 사람들도 제공할 수 있다. 도움을 주는 능력이 교육이나 전문분야의 학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인간의 속성으로 본다.
    5. 금전적 및 정책적 결정에 대한 책임을 포함하여 서비스의 전체적인 방향은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6. 서비스를 받는 클라이언트들의 참여가 이전환자들로만 제한될 것인지, 아님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7. 서비스에 대한 책임은 클라이언트의 가족이나 친척, 치료 시설, 정부가 아닌 클라이언트에게 가진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정보는 클라이언트의 동의 없이 다른 어떤 제3자에게 전송되지
    말아야 하고, 그러한 정보는 클라이언트가 입수 가능해야만 한다.
     


     7. 재정 및 다른 현실적인 문제들


    창설하기를 바라는 대안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결정한 후 창단 그룹은 그 다음에 다수의 실용적인 문제들로 관심을 돌려야만 한다. 이것들 중의 첫 번째는 금전이다. 또다른 중요한 실질적인 결정은 제안된 시설의 위치이다.
    다른 실질적인 문제들은 철학적인 고려를 포함하기도 한다. 내부조직은 그런 한 문제이다.

    어떤 종류의 대안 서비스를 그룹이 수립하기로 결정하든지 간에 그것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을 찾는 것에 대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혁신적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 조달원을 찾는 것은 어렵다. 그 어떤 다른 단 하나의 요인보다 아마도 돈의 결핍이 아주 적은 대안시설이 계획하는 단계를 넘어서 진척되도록 이끌었다.

    전통적인 서비스는 언제나 예외 없이 명성과 권력의 몇 겹의 층이 있는 계급 조직으로 거의 체계화되어 있다. 계급 조직은 일상의 서비스 전달을 낮은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의 손에 놓는 반면, 더 높은 수준에 있는 의사결정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클라이언트들은 전적으로 의사결정에서 제외된다. 계급조직은 감독하는 직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구조보다 본질적으로 더 비싸다. 이미 우리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계층적 정신건강 시설들을 살펴보았다: 대안은 더 나은 것일 뿐만이 아니라 더 저렴하기까지 하다.

    자금을 신청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료한 과정이다. 그룹의 한 멤버가 과거에 제안서를 작성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런 경험은 귀중하다고 증명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룹은 고문으로 기꺼이 봉사하려는 친구나 그러한 경험이 있는 안면 있는 사람을 찾아내거나 제안서작성의 경험을 가진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현지의 다른 지역단체에 의견을 묻기를 원할 것이다.

    두 개의 성공적인 대한 서비스-<정신과환자들의 협회>와 <벤쿠버 정서 응급센터>-가 벤쿠버에서 시작된 하나의 이유는 캐나다 정부의 진보적인 자금 정책 때문이었다. 벤쿠버 정서 응급센터와 정신과환자들의 협회 양자 모두는 그들의 초기 자금을 지역사회에 기초하고, 혁신적인 사회복지 서비스 프로젝트에 특별히 투자하기 위해 디자인된 연방정부의 프로그램인 지역 주도 프로젝트에서 얻었다. 결정을 내리는 중심부가 특별히 정신건강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오히려 사회복지 서비스에 관계한다면 대안 서비스를 위한 승인을 얻는 것이 더 쉽다.

    종종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대안시설에 대해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들은 환자들을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데에 아주 익숙해져 있어서 이전환자들이 대안 서비스의 관리자이고, 클라이언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힘들어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이고, 기능하는 대안들에 직면하여,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이전환자들이 무능하다고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다루도록 억지로 떠밀어질 것이다. 이것은 전문가들에게 인식제고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순전히 실용적인 것으로써의 어떤 사안들에 대한 이런 명칭은 부자연스럽다. 펀딩, 내부 구조, 지역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은 철학적인 질문들이기도 하고, 실용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안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혹은 시작하는 것을 시도하는) 그룹은 사회가 “정신장애인/질환다”들을 보는 방식과 관련된 기본 아이디어들의 일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행위이다.



    8. 강압 또는 협조?


    통제에 강세를 둔 강압적인 정신보건 시스템의 긴 역사는 진실로 열린 시스템이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게 한다.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로 비춰져 환자들은 엄격한 통제 하에 있게 되고, 이는 그들이 감금되어야 하는 막연한 느낌을 더욱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정신장애인/질환자들이 “미쳐 날뛰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시작하고, 그 이미지는 영속된다. 드물게 환자들이 폭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오직 통제의 효과에서 기인된다고 생각한다. 비강압적인 모델은 상상하기가 불가능해진다.
    기묘함에 대한 신념과 한데 얽혀 있는 것은 정신과환자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정신병/정신질환이 다른 어떤 질병과 다르지 않고, 또 그러하기에 낙인이 아니라는 문장을 일반적으로 밀어주는 국가정신건강협회는 정신과환자들을 어떻게 체포할지를 지시하는 경찰관들을 위한 소책자를 출판한다. 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심장병, 당뇨, 또는 암이 있다고 하여 경찰이 차로 운반하지 않는다.
    위험에 대한 신화는 계속적으로 영속된다. 텔레비전 범죄 쇼들은 정신병/ 정신질환이 그의 살인적인 광란에 기여하는 “사이코패스 킬러” 없이 폐업할 것이다. 아주 적은 정신과환자들만이 범죄를 저지를지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다수가 아닌 범죄를 저지르는 소수만이 널리 선전된다. 법을 준수하는 삶을 사는 이전환자들은 일반적으로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간다. 미디어는 객관적이 되기 위해 한 사람의 이전환자 신분을 보고하지 않는다. 이전환자는 폭력적이고, 위험하고, 예측불허인 개인을 위한 코드명이다.
    문제에 대해 진정한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은 치료로 가장하는 강압의 시스템에 의해 나쁘게 접대된다. 보살핌과 관심을 기대하며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가는 사람들은 거친 각성을 하게 된다. 수용시설 안에 있게 되면, 그들의 문제에 도움을 구하는 자의입원 환자들과 자유만을 원하는 비자의 입원환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환자들은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대우받는다. 상담 및 조언을 찾기를 기대하는 환자들은 그 대신 신경안정제를 얻는다.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그들의 감금을 정당화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아니다. 차이가 병리에 대한 정신의학적 판단일 때, 거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카테고리가 만들어지고, 그건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물론 국가는 사람들의 삶에 개입할 권리 및 그들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아마도 그들을 감금할 권리가 있다.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 이상하게 옷을 입는 사람들, 바르게 먹지 않는 사람들, 또는 다른 정신의학적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다. 단순히 이상하거나 별난 것은 공격적인 것과 동일한 카테고리에 있지 않다. 타인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감금되어야 하고, 정신의학적 정당화에 대한 의뢰 없이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충분한 법안은 존재한다. 비자의 입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항상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또는 그들이 잠재적으로가 아니라 진실로 위험하다는 것을 국가가 증명해야만 했다면 자유로이 갈 사람들이다.

    정신병원이나 관련시설에 감금되어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법도 위반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범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정신장애인/ 정신질환자로 진단된 것이다. 미국의 대중들은 이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마도 먼 훗날엔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9. 환자 말고, 사람들


    우리는 정신건강과 정신병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살펴보고, 우리의 문화에 침투하는 정신의학적 신화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근심이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아픈 상태에 있다고 정의될 때 그들은 정신의학적 치료에 대한 부가적인 고통과 정신과환자가 되는 것에 대한 낙인으로 고통 받는다.
    그 어떤 사람도 정신과환자가 될 수 있기에, 이것은 환자들과 이전 환자들에게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문제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부여된 사회적 역할에 원활하게 들어맞는 사람들, 근심이 있거나 불행한 사람들은 쉽게 그 자신들이 정신의학적으로 레이블되고, 강제치료의 실험대상이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근심이 있는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종종 그들이 너무 늦게 발견하는 것은 그곳에선 진정한 도움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과 병원에 들어온 이상 떠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우리가 고립시키는 근심하는 친족과 친구들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우리가 차라리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놓을 일이기에, 정신병원 시스템은 발현되었다. 근심이 있고, 불행한 사람들이 변하고 성장하도록 허용할 대안의 종류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더 이상 문제들을 시야 밖으로 쓸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자신의 근방에서 인근 위기센터, 드롭인 센터, 지역사회의 레지던스, 그룹 홈의 설립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조금 다르고, 조금 이상하게 남을 수년간의 정신의학적 감금으로 인해 아주 손상된 사람들조차도 우리의 이역사회로 다시 환영해야 한다. 우린 정신병원 시스템에 종결을 가져옴으로써만 정신의학의 실수를 너무 오랫동안 숨겼던 벽들 뒤에서 쇠해 온 이러한 만성 환자들의 새로운 세대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적이고,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대안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만이 우린 오늘날의 근심 있는 사람들을 비슷하게 손상시키고, 무력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문제들”을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낙인찍고, 우리 자신 깊숙한 곳에 있는 문제들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게 하는 시스템을 없앨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거짓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그것이 치료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종류의 어려움들이 질병이고, 그러한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의학 시스템은 우리 모두에게 피해를 입힌다. 오직 진정한 대안들을 발전시킴으로써만 우린 너무 오랫동안 정신의학의 통제 하에 고통 받았던 환자들을 그것이 “돌본” 것보다 우리가 서로를 훨씬 더 잘 돌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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