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증 범죄라는 유니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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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증 범죄라는 유니콘
언제쯤 '조현병 범죄' 라는 스포츠를 멈출 수 있을까? 혐오를 멎게 할 수 있을까? 유니콘이라는 가상의 생물이 있다. 유니콘은 우리의 정신 세계에만 존재한다. 사람들이 이 유니콘을 빌미로 현실의 당사자들을 비난하고 차별한다.
'정신질환자 통보'는 차별이다. "정신질환자의 퇴원 사실을 본인 동의없이 관련 기관에 통보하도록 한 법안은 인권침해"라는 것이 인권위의 판단이며 진실이다.
'조현증 범죄'란 없다. 범죄자와 그 피해자가 존재할 따름이다. 조현증과 범죄율은 무관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존하지도 않는 '조현증 범죄' 기사 몇 가지에 그토록 스포츠 마냥 열광하고 삿대질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정신장애인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조현증이라는 것은 쉬쉬하며 자기들끼리 병원에나 가서 '사적으로' 치료 받으면 끝날 문제였다. 그런데 범죄니 차별이니, 공공연한 영역으로, '우리의 기득권' 안으로 자꾸만 침투하려 한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아예 '범죄자' 딱지를 끊어서 병원 안에다 다시 얌전히 가둬두고 없는 양 '우리끼리' 편하게 살아가야지.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고 낙인과 편견을 강화하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수많은 사회적 편견이 존재한다.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범죄자' 편견인데, 이 문제의 본질은 계급의 이해관계로 얼룩진, 철저한 공/사 영역 구분과 그 '선택'에 대한 미신에 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일상적으로 겪는 개인적 경험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사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혼자 병원에 가서 치료 받고 밖에 나와서는 조용히 살아가야 하는, 개인의 부담으로 은신되어야만 했다.
당사자들은 선택의 상황에 놓인 것이라는
압박을 받곤 한다.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책임이라는, 노력에 대한 미신이 있다. 현대 소비지상주의가 기대고 있는 선택의 독재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킨다. 왜 나는 노력하고 '선택'했는데 좋은 결과가 없지? 겹겹이 삶이 누적될 수록 피로감이 늘어날 따름이다.
그러니 사적 영역의 정신장애란 이 넓은 시장과 '자유'의 파도 속에서 내가 왜 더 좋은 선택을 하지 못했지? 왜 조금 더 '모범 환자'가 되어 낫질 못했지? 그런 고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사 이분법과 선택이라는 자기검열의 이데올로기가, 정신장애인이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끔, 가시화하려는 노력을 짓밟는다.
당사자의 문제는 결코 '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당신들의 문제,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문젯거리다. 우리가 나서는 것은 병동에 격리되어 있지 않고 나와서 쪼잘대는 것 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 행동이다. 우리의 법적 사회적 권한을 향한 발언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 후의 해답은 훤하다. 정신장애인의 동의 없는 정보 유출은 억압이다. 조현병 범죄란 없다. 그런 것은 유니콘이다.
언제쯤 '조현병 범죄' 라는 스포츠를 멈출 수 있을까? 혐오를 멎게 할 수 있을까? 유니콘이라는 가상의 생물이 있다. 유니콘은 우리의 정신 세계에만 존재한다. 사람들이 이 유니콘을 빌미로 현실의 당사자들을 비난하고 차별한다.
'정신질환자 통보'는 차별이다. "정신질환자의 퇴원 사실을 본인 동의없이 관련 기관에 통보하도록 한 법안은 인권침해"라는 것이 인권위의 판단이며 진실이다.
'조현증 범죄'란 없다. 범죄자와 그 피해자가 존재할 따름이다. 조현증과 범죄율은 무관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존하지도 않는 '조현증 범죄' 기사 몇 가지에 그토록 스포츠 마냥 열광하고 삿대질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정신장애인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조현증이라는 것은 쉬쉬하며 자기들끼리 병원에나 가서 '사적으로' 치료 받으면 끝날 문제였다. 그런데 범죄니 차별이니, 공공연한 영역으로, '우리의 기득권' 안으로 자꾸만 침투하려 한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아예 '범죄자' 딱지를 끊어서 병원 안에다 다시 얌전히 가둬두고 없는 양 '우리끼리' 편하게 살아가야지.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고 낙인과 편견을 강화하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수많은 사회적 편견이 존재한다.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범죄자' 편견인데, 이 문제의 본질은 계급의 이해관계로 얼룩진, 철저한 공/사 영역 구분과 그 '선택'에 대한 미신에 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일상적으로 겪는 개인적 경험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사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혼자 병원에 가서 치료 받고 밖에 나와서는 조용히 살아가야 하는, 개인의 부담으로 은신되어야만 했다.
당사자들은 선택의 상황에 놓인 것이라는
압박을 받곤 한다.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책임이라는, 노력에 대한 미신이 있다. 현대 소비지상주의가 기대고 있는 선택의 독재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킨다. 왜 나는 노력하고 '선택'했는데 좋은 결과가 없지? 겹겹이 삶이 누적될 수록 피로감이 늘어날 따름이다.
그러니 사적 영역의 정신장애란 이 넓은 시장과 '자유'의 파도 속에서 내가 왜 더 좋은 선택을 하지 못했지? 왜 조금 더 '모범 환자'가 되어 낫질 못했지? 그런 고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사 이분법과 선택이라는 자기검열의 이데올로기가, 정신장애인이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끔, 가시화하려는 노력을 짓밟는다.
당사자의 문제는 결코 '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당신들의 문제,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문젯거리다. 우리가 나서는 것은 병동에 격리되어 있지 않고 나와서 쪼잘대는 것 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 행동이다. 우리의 법적 사회적 권한을 향한 발언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 후의 해답은 훤하다. 정신장애인의 동의 없는 정보 유출은 억압이다. 조현병 범죄란 없다. 그런 것은 유니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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