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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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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른 사회가 만든 정신질환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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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들가을달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51회   작성일Date 25-12-30 15:17

    본문

    게으른 사회는 치안 실패의 책임을 정신질환자들에게 전가한다.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회는 구조를 돌아보는 대신, 가장 만만한 표적을 찾는다. 

    최근 5년간 정신질환 외래환자 수가 약 64만 명 증가하는 등 정신건강 관련 통계는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럼에도 미디어는 범죄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가해자의 정신질환 치료 이력을 조회하며, 정신질환자라는 이미지를 하나의 범죄 코드로 소비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질환자는 ‘위험한 존재’로 단순화된다.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용어와 밈, 예컨대 ‘누칼협’, ‘정병러’ 같은 말들은 혐오와 차별로 범벅되어 있다. 

    이런 표현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곧잘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문제 제기는 가볍게 무시되고, 소수성은 희화화되며 조롱의 대상이 된다. 

    정신질환과 정신질환자를 향한 차별의 역사는 그렇게 깊고 오래되었다.


    그렇기에 실제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당사자와 가족들은 사회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는다.
    “왜 치료를 받지 않느냐.”
    “이기적인 것 아니냐.”


    그렇다면 툭 까놓고 묻고 싶다. 당신들 같으면 정말 치료를 받고 싶겠는가.

    나는 2019년부터 치료를 받아왔다. 6년 동안 한 번의 자의입원이 있었고, 그 시간 내내 치료 환경에 대한 괴리감을 느꼈다. 

    처음 진단을 받고 F코드가 찍혔을 때, 나는 비로소 ‘낙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미 살기 힘든 삶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더 살기 어려워졌다. 

    치료와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 언젠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을 성실히 따랐음에도 돌아온 말은 ‘애매하다’였다.

    완치가 어렵고,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수도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남들처럼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타인은 나를 게으른 사람, 기능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치료라는 이름으로 내 삶에 공백이 생긴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물론 이 문제가 병원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느낀다. 대한민국은 한 평생 효율과 속도를 강요해왔다. 

    쉬는 것은 곧 낙오이자 실패처럼 여겨진다. 과연 다른 나라라고 다를까. 완전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나라만큼 극단적인 곳은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치료 환경이 과연 안전하고 존엄한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정신건강 문제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병원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통제’를 기본값으로 삼는다.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십 년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공간. 그 두려움과 공포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열악함은 구체적인 장면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평소 먹던 약이 아닌 새로운 약이 추가되어 “이건 어떤 약이냐”고 물었을 때, 

    간호사는 설명 대신 짜증 섞인 말투로 “먹으라”며 복용하지 않으면 격리실로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거부한 것이 아니다. 평소 먹던 영양제에 모르는 약이 섞여 있다면, 누구라도 질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당사자’라는 이유로 질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약을 삼켰는지 확인하기 위해 입을 벌리고 혀를 보여야 했고, 그 과정을 하루에 세 번씩 반복했다. 

    이런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권 침해를 경험한다.

    또 다른 문제는 스마트폰의 부재다. 멀쩡한 개인 휴대폰이 있음에도 병원에 설치된 전화부스를 이용해 돈을 충전하고 연락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병원은 연락 확인 시간을 주기도 하지만, 보호사는 “확인만 하고 나가라”며 성질을 낸다. 나는 치료를 받으러 왔고, 비용을 지불하며 입원해 있는 환자다. 

    그럼에도 강압적인 태도 앞에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다 격리실로 끌려가면 언제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나는 체념과 공포를 배웠다. 이곳은 치료 공간이 아니라 마치 교도소, 혹은 수용소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군대에서도 스마트폰 사용이 허용되는 시대다. 그런데 정신병원은 그보다도 뒤처져 있다. 

    몇 주, 몇 달, 몇 십 년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치료 기간이 아니라 인생의 상당 부분을 강제로 빼앗기는 일이다. 

    새장 안에 갇혀 하늘이 어떤 색인지,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이런 강제적 고립 속에서 퇴원을 맞이하면, 삶에는 커다란 공백이 남는다. 

    그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애써도 시간은 점점 더 멀어지고, 결국 허탈감과 절망감만 남는다. 

    삶의 의지는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


    이야기하지 않은 문제는 더 많다. 병원에서는 식사, 수면, 화장실 이용까지 모든 것이 통제된다. 

    심각한 부작용을 호소해도 가볍게 넘겨지기 일쑤다. 

    문제가 발생한 뒤에야 대응하는 현실은, 마치 생체실험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면 “그 정도는 아니지 않냐”는 말로 쉽게 부정당한다. 

    개인의 경험은 한 줌 재처럼 흩어진다. 이 나라가 얼마나 이상하고 경직된 사회인지 실감하는 순간이다.

    사회적 문제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버겁다는 이유로 생각을 멈춘다. 대신 정신질환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않는 한, 타인의 손에 희생되는 죽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방치한다면, 이 시대는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 대가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


    이미 그 징후는 분명하다. 

    현재 청년 자살률은 13년 만에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10만 명당 24.4명. 미래라 불리는 청년들조차 정신건강과 삶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운 환경 속에 놓여 있다. 

    저조한 취업률과 불안정한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이미 정서적 절망의 시대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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